정석구 논설위원실장
워터게이트 사건이 한창 진행중이던 1973년 11월17일,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플로리다에서 텔레비전 기자회견을 열어 그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는 “공직을 통해 사적인 이익을 취한 적이 없다”고 몇 번이나 강조한 뒤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공직생활을 통틀어 나는 정의를 어긴 적이 없습니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사기꾼인지 아닌지 알아야 합니다.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하지만 기자회견 8개월 뒤 닉슨은 결국 ‘사기꾼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안고 미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임기 도중 사임했다.(토머스 J. 크라우프웰 <대통령의 오판>)
대통령을 비롯한 공직자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함정은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을 혼동하는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주된 동기 중 하나는 재선에서 최대한 큰 표 차이로 이기겠다는 닉슨의 욕심이었다. 닉슨은 재선에서 이기려는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 공적인 조직과 자금을 이용해 불법을 자행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끝까지 자신의 책임을 회피했다. 74년 8월9일 백악관 직원들에게 한 고별연설에서 “나는 이 정부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 (임기 중) 실수도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고 말했다. 재선에서 당선이라는 개인적인 이익을 마치 국가의 공적인 이익인 것처럼 교묘히 둘러댄 것이다.
온갖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집터 매입 사건은 워터게이트 사건과 여러모로 유사하다. 가능한 불법과 편법이 총동원됐다는 점에서 ‘내곡동 게이트’로 불릴 만하다. 대통령이 퇴임 뒤 거처할 집터 매입이라는 사적 행위를 공적 행위와 혼동해 공적 기관과 자금을 총동원했다는 점도 워터게이트 사건을 빼닮았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교묘히 뒤섞는 방식으로 사익을 추구하며 살아온 이 대통령한테는 이번 일이 자연스러울지 모르지만 도덕적으로나 실정법상으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심각한 사안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그의 또다른 저서 <왜 도덕인가?>에서 ‘윤리적 기반을 잃은 정치야말로 국가와 국민의 공공선에 해악을 끼치는 가장 무서운 적’이라고 지적했다. 정치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의 도덕성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민주주의 후퇴 등 여러 측면에서 우리 사회를 퇴행시켜 왔다. 그중에서도 자신의 도덕성 상실로 인해 국민을 가치관 혼란에 빠뜨리게 한 것은 쉽게 치유하기 힘든 중대한 해악 중 하나다. 이는 공익과 사익을 혼동시킴으로써 우리 사회의 공공성을 훼손하고 결과적으로 사회질서와 공동체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번 ‘내곡동 사건’은 이 대통령의 이러한 부도덕성의 총체적 집합체이다.
뒷수습 방식도 워터게이트 사건과 비슷하다. 사건이 불거지자 이 대통령은 “아들 이름으로 된 땅을 내 명의로 돌리라”고 지시했다. 그래도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어제는 대통령실장에게 전면 재검토해 이른 시일 안에 결론을 내리도록 했다. 자신의 책임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꼬리 자르기에 급급할 뿐이다. 애꿎은 경호처장만 잘리게 생겼다.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사건을 파고들던 연방수사국(FBI)에 압력을 가해 조사를 중단시키려 했다. 미국 의회 청문회에 관련 자료 제출을 거부하거나 자료를 조작하기까지 했지만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자 홀드먼 백악관 비서실장 등 관련자들을 차례로 사퇴시켰다. 꼬리 자르기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사건은 닉슨이 사임하고, 40여명의 관련자가 기소되거나 감옥에 간 뒤에야 마무리됐다.
닉슨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과오에 대해 진정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70년대 후반 미국의 유명한 토크쇼 진행자인 래리 킹과의 대담에서 “나는 과거 속에 살지 않는다. 나는 미래를 생각하는 게 좋다”며 워터게이트 사건에 눈을 감았다. ‘사기꾼 대통령’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기회를 스스로 외면한 셈이다. 이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그 또한 닉슨 같은 처지에 몰릴지도 모른다. 본격적인 ‘내곡동 게이트’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논설위원실장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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