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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사람] 이성의 야만

등록 2011-09-28 19:26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이탈리아의 미항 나폴리는 18세기 유럽의 문화 지도에서 벽지였다. 거기서도 변두리 골목에서 1668년 잠바티스타 비코라는 천재가 태어났다. 시대를 앞선 천재라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천재는 천재가 알아보는 법. 깊이 있고 멀리 보면서도 번득이는 그의 통찰에 매료된 사람들은 경의를 표하며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나름 천재인 미슐레, 크로체, 조이스, 사이드 같은 인물들이 여기 속했다. 1968년 탄생 300돌 기념 국제학술대회에 인문학 거의 모든 분야의 최고봉 학자들이 대거 참여해 그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지만, 대중에게 비코는 여전히 낯선 이름이다.

그의 혜안 중엔 ‘이성의 야만’이란 게 있다. 야만이란 미개하여 이성이나 문명이 발전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조화와 절제에 대한 관념이 없어 거친 폭력이나 감정의 폭발에 의존하는 행태를 가리킨다. 이성이나 문명이란 개념은 야만과는 대척점에 있는데, 그런 단어들의 조합이 어떻게 가능할까?

비코는 ‘이성의 야만’의 대립으로 ‘감각의 야만’을 든다. 그것은 물리적 폭력과 야수적인 감정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야만이다. 눈으로 볼 수 있고 감각으로 느낄 수 있기에 ‘감각의 야만’이다. 이 원초적 야만은 덜 위험하다. 쉽게 눈에 띄어 방어하거나 도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위험한 것은 ‘이성의 야만’이다. 겉으로는 부드러운 말로 포옹을 하면서 뒤에서는 친구와 친지의 등에 비수를 꽂는 야만이다. 말과 사물이 일치하지 않는 반어법, 즉 아이러니의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이 야만은 보이지 않아서 더 위험하다.

‘운하 사업’이 ‘4대강 정비 사업’이라는 껍데기로 바뀌어 진행된다. ‘법치’라는 명목 아래 법은 있는 자들의 큰 권한을 비호하고, 없는 자들의 작은 권리마저 박탈한다. 일본 지진이라는 미증유의 참사를 목격하였음에도 눈앞의 ‘실익’을 위해 원전을 옹호한다. 모두가 ‘이성의 야만’이다.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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