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이럴 때면 오세훈 전 서울시장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냥 역사가 맡긴 임무를 충실히 한 것이었다고 치면 될까? 어쨌든 그가 고맙다. 서울 시민들이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두고 갑자기 활기찬 토론을 벌이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사건사, 국면사, 그리고 장기 지속적 구조사라는 세 차원의 역동적 움직임이다. 아동 급식 문제로 시장 보궐선거까지 치르게 된 사건이 ‘폴트라인’(지진을 유발하는 단층선)이 되어 드디어 대규모 구조 변동의 지각변동을 일으킬 모양이다. ‘꾼’과 ‘쇼’만 만발한 정치계에 눈길 가는 것조차 아깝다던 청년들이, 정치를 보려면 텔레비전 역사드라마나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이 차라리 낫다던 중년의 시민들이 갑자기 시정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지지율이 치솟던 안철수씨가 가볍게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또 한번 이번 사건이 예사롭지 않은 것임을 확인시킨다.
시민들이 앞으로 47일 동안 보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소통의 축제라 생각한다. 후보들의 연속 텔레비전 토론회는 어떨까? 서울시민들이 원하는 시장은 행정의 달인도, 올바른 정책을 강조하는 사람도 아닐 것이다.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새판을 짜기 시작할 사람을 원할 것이다. 그간 경제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진행된 뉴타운과 재개발 사업들이 시민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고 있는지, 광화문 사거리에 무성한 은행나무가 사라지고 어느 날 갑자기 들어선 돌 화분과 분수와 설치 무대를 보면서 이런 것을 주민투표해야 하는 것 아닌지 되물은 시민이 있었다. 세계 어느 곳보다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청년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젊은 문화작업자들이 마구 죽어가는 서울, 불야성처럼 불을 밝힌 에너지 낭비의 천국 서울, 시민이 기대하는 시장은 아마도 이런 문제를 풀 수 있어야 할 것인데, 이는 쉽게 풀릴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시민들은 그가 무엇보다 소통과 네트워킹 능력을 가진 사람인지 보고 싶어할 것이다.
이때 네트워크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의 수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탁월함의 네트워크’, 곧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가진 사람들, 자신이 배울 것이 있는 사람들의 수일 것이다. 이때의 탁월함이란 상식, 자아 통합성, 소박함, 정직함, 차이에 대한 존중과 연대 등의 지향성과 관련되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후보가 얼마나 정치공학이 아닌 지역정치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는지, 얼마만큼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여 배울 수 있는지를 판단하고 싶어서 텔레비전 앞에 모여들 것이다. 누군가가 써준 원고를 읽지 않고 자기 생각을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 동시에 그가 토론회에 데리고 올 참모가 누군지 알고 싶어할 것이다. 그가 가장 신임하는 참모들을 통해 후보의 안목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보고 싶은 것은 그가 앞으로 21세기의 공동체적 삶에 가장 중요한 이슈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에너지, 청년실업, 경제 회생, 사회 재생에 대해 어떤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언어화하고 있는지다.
솔직히 말하면 이번 선거에서 누가 되는지에 나는 별 관심이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번 토론을 통해 서울시민들이 더욱 성숙해지는 것이다. 결국 서울시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시민이고, 정치 역시 시민들의 몫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 시민들은 정치가 ‘승부’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점을 확인했을 것이다. 글로벌 시대의 지방자치, 서울이라는 곳을 하나의 소통공동체로 만들어가고, 냉소적인 시민들이 다시 자신의 삶을 정치와 연결시켜내는 장이 열려야 할 때이다. 삶의 이야기가 가능한 시공간을 만들어낼 줄 아는 시장이 들어와 준다면, 서울시는 폴트라인으로 인한 지각변동을 통해 아주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게 될 것이다. 마침 아침에 지인이 박경리 선생님의 묘소 앞 비석에서 찍었다는 사진을 보내왔는데 그 돌에는 “피동적인 것은 물질의 속성이고 능동적인 것은 생명의 속성”이라고 적혀 있었다. 생명력 있는 서울, 앞으로 4년, 아니 47일간의 활기 있는 날의 시작을 기대해본다.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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