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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석구 칼럼] 주제넘은 검찰총장

등록 2011-08-17 19:30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엊그제 검찰 고위 간부 인사가 있었다. 예상대로 서울중앙지검장과 대검 중수부장 등 요직은 고려대와 티케이(TK) 출신이 독차지했다. 한상대 신임 검찰총장이 선포한 ‘3대 전쟁’을 치를 진용을 완벽하게 갖춘 셈이다.

한 총장은 지난 12일 취임식에서 ‘검찰은 체제 수호자’ ‘3대 전쟁 선포’ ‘종북좌익세력 근절’ 등과 같은 살벌한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이번에 새로 짜인 검찰 수뇌부는 한 총장의 이런 지침을 행동으로 충실하게 뒷받침할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권력지향적이고 자의적인 검찰권 행사가 이뤄질지 벌써 걱정이다. 이런 우려를 하는 것은 한 총장의 취임사가 너무나 주제넘고 시대착오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체제 수호자’란 말부터 그렇다. 한 총장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함을 내세우며 검찰이 이를 수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누가 언제 검찰에 체제 수호의 임무를 맡긴 적이 있는가. 검찰청법 제4조는 검사의 직무를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범죄수사, 공소의 제기 및 그 유지에 필요한 사항’ 등 6가지가 검사의 직무와 권한이다. 검찰에 체제 수호의 직무를 부여한다는 조항은 어디에도 없다.

헌법에 명시된 ‘민주공화국’이란 국체는 국민 모두가 지켜내는 것이다. 체제 수호란 표현은 국민의 대표기관도 아닌, 차관급 임명직에 지나지 않는 검찰총장이 입에 올리기에 적절치 않은 말이다. 더구나 한 총장은 국회 청문회에서 위장전입 등 많은 비리 의혹이 제기돼 인사 청문 경과보고서조차 채택되지 못했다. 애초 총장 자격 미달이었던 인물이다. 그런 총장이 체제 수호 운운하다니 오만하기 그지없다.

‘종북좌익세력 근절’이란 발언은 1950년대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을 떠올리게 한다. 매카시즘은 잘 알려진 대로 조지프 매카시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의 “국무부 안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연설에서 발단했다. 당시 유명 희극배우였던 찰리 채플린도 공산주의자로 몰릴 정도로 매카시즘은 미국 정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공산주의자란 뚜렷한 근거도 없이 몰아친 매카시 광풍으로 미국은 적잖은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했다.

우리 사회에서 간첩활동을 하는 등 체제를 위협하는 세력이 있다면 관련법에 따라 수사해 처벌하면 된다. 검찰총장이 앞장서 “종북주의자들과의 싸움에서 결코 외면하거나 물러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지레 공안 분위기를 조성할 일은 아니다. 한 총장 발언은 역사의 시곗바늘이 60여년 전의 오제도 반공검사 시절로 되돌아간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당시 오 검사는 국회 프락치 사건, 조봉암 진보당 사건 등 굵직한 공안사건을 주도했다. 그런 사건들은 이승만 정권 유지에 큰 도움을 줬다. 하지만 조봉암 사건이 올해 1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됐고, 다른 사건들도 조작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정치적 중립’을 내팽개치고 검찰권을 체제 유지 수단으로 악용할 경우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반면교사다.

대검찰청 누리집에는 ‘초대 검사 이준’이 소개돼 있다. 헤이그 밀사로 파견됐던 그 이준 열사다. 구한말의 법관양성소 1회 졸업생인 그가 옷을 벗게 된 사연이 흥미롭다. 1907년 고종황제가 은사령(특별사면)을 내리자 대한제국 법부는 이준에게 은사 대상자 명단을 내려보내 그대로 작성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준은 은사안 작성이 검사의 고유 권한이라며 법부 요청을 거부하고 다른 명단을 작성했다. 그러자 상관이 이를 원래 명단으로 변경해 황제에게 보고했고, 이준은 은사안을 임의로 변경한 법부 형사국장을 고소하는 등 끝까지 저항하다 옷을 벗었다고 한다.

검찰이 이준을 누리집에 올려놓은 건 그가 검사의 본령을 보여줬다고 여겼기 때문일 터이다. 한 총장도 시대착오적인 종북좌익 타령을 할 게 아니라 대한민국 검사들이 살아있는 권력과 한 치도 타협하지 않았던 이준 같은 기개를 갖도록 하는 데나 힘쓰기 바란다. 임기가 끝난 뒤 “권력자의 눈치를 보며 ‘영혼 없는 하명수사’나 하고, 체제 수호를 빙자한 ‘정권 보위대’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논설위원실장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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