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주 언론인
미국의 뉴스채널인 <시엔엔>(CNN)에 ‘크로스파이어’(Crossfire)라는 시사 대담 프로가 있었다. 황금시간대인 저녁 7시부터 매일 30분 방영된 이 프로그램은 ‘크로스파이어’라는 이름 그대로 상대방에게 말로 ‘일제사격’을 가하는, 뜨겁고 치열한 논쟁이 주를 이뤘다.
프로그램 포맷은 ‘크로스파이어’ 하기 딱 좋은 그런 구성이었다. 진보와 보수의 대표 논객이 공동으로 사회를 보면서, 초대받은 인물을 놓고 좌우에서 질문을 쏘아대고, 서로간에도 한치의 양보 없이 말의 전쟁을 했다.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진보와 보수의 논리와 가치관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시청자들은 이를 보며 자기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1982년부터 23년간 매일 저녁 전세계에 방영되었다. 그러니까 30년 전 미국에서 시작된 이런 포맷의 시사 대담 프로가 21세기 한국의 <문화방송>에서는 불가능하다. 최근 발동된 ‘긴급조치’ 때문이다. ‘개헌’ 소리만 해도 감옥에 집어넣던 유신 때의 긴급조치를 빼다 박은 이 심의규정에 따르면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사안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지지 또는 반대하거나, 유리 또는 불리하게 하는 발언이나 행위”를 하는 인물은 고정 출연자로 나올 수 없다.
놀랍다. ‘사회적 쟁점’에 대해 ‘자기 생각’이 없는 ‘무뇌아’들만 출연시켜 시사 토론을 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놀랍고, 이런 것을 규정이라고 만들어 시행하는 배짱도 놀랍고, 아무 문제 없이 잘 시행되리라 믿는 무모함은 더욱 놀랍다. 천치바보이거나, 국민을 졸로 보는 오만과 독선 외에 달리 설명이 안 된다. 더구나 이 ‘긴급조치’가 건강한 시민으로 자기 견해를 밝혀온 탤런트 김여진씨의 출연을 막기 위해 급조된 ‘김여진법’의 성격이라니, 이런 결정을 내린 사람들의 뇌를 들여다보고 싶다.
옆집 <한국방송>도 매우 시끄럽다. 서로 망가지기 경쟁이라도 하는가 싶을 정도다. 그런데 한국방송에서 벌어지는 ‘도청 의혹’과, (어떤 경로로든) 입수된 녹취록을 한나라당 의원에게 건넨 ‘공작정치’ 사건은 방송의 존립까지 위협하는 매우 엄중한 사건이다. 범죄행위이기 때문이다.
‘도청 의혹’과 관련하여 한국방송은 처음에는 ‘귀대기’ ‘벽치기’ 등 정상적인 취재행위라고 했다가, 시비가 계속되자 “민주당이 주장하는 식의 이른바 도청행위를 한 적은 없다”고 말을 바꾸더니(이 말은 ‘다른 형태의 도청’을 했다고 자인한 말이다), 그다음에는 ‘제3자의 도움’을 받았다고 다시 말을 엎었다. 이즈음 경찰 수사 대상이던 장아무개 기자의 노트북과 휴대전화가 참으로 우연하게도 사건 발생 직후 모두 분실되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런 종류의 사건이 거대 권력집단에서 발생했다면 한국방송은 뭉개고 그냥 있으라고 보도했을까, 아니면 스스로 신뢰성을 파괴하는 말바꾸기와 거짓말은 그만하고 진실을 밝히라고 촉구했을까. 진실 추구가 언론의 생명이니 답은 자명하다. 그런데 지금 스스로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진실을 밝히기는커녕 이를 요구하는 내부 목소리까지 진압하는 데 급급하다. 한국방송 새노조가 진실을 밝히는 작업의 일환으로 사내 여론조사를 하자, 그게 회사의 명예를 손상하는 행위라며 처벌하겠다고 겁박하고 나섰다. 오죽했으면 지금처럼 험악한 분위기에서 젊은 기자 166명이 이름을 내걸고 저항의 깃발을 들었을까.
여기에다 ‘공작정치’ 의혹의 한쪽 자락을 쥐고 있는 한나라당 한선교 의원은 ‘면책특권’이라는 소가 웃을 소리를 하면서 뒤로 숨었다. 국민을 졸로 보는 오만방자한 태도다.
최근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후보자 지명, 유인촌 특보 임명에서 보듯, 제 주변 충성파 인사만 챙기는 이명박 대통령의 인사방식이나, 4대강 속도전 같은 정책 추진을 보면,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자기 중심의 독선와 오만이 여전히 가득한 것 같다. 윗물이 이러니 그 아래 종속된 ‘특보 출신’ 사장이나 ‘큰집 가서 조인트 까였다’는 사장이나 하는 짓이 다 그렇고 그렇다. 공영방송은 이렇게 망가지고 있는데, 이제 곧 족벌·수구신문들의 방송까지 출범하게 되니, 이 땅의 언론 토양은 끝없이 황폐해져가고 있다.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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