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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사람] 드레퓌스 사건

등록 2011-07-18 19:30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드레퓌스 사건은 1890년대부터 장기간 프랑스를 이념적으로 갈라놓았던 정치적 스캔들이다. 1894년 11월 젊은 유대인 포병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프랑스의 군사 기밀을 파리 주재 독일대사관에 넘겼다는 이유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의 섬에 유배되었다. 2년 뒤 프랑스 육군의 다른 장교가 진범이었다는 정보가 나타났다. 그러나 군법회의에서는 새로운 증거를 묵살하고 재판 개시 이틀 만에 만장일치로 혐의자를 석방했다. 드레퓌스는 석방되기는커녕 다른 정보 장교가 날조한 문서를 근거로 추가로 기소되었다.

1898년 1월 저명한 소설가 에밀 졸라가 파리의 신문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격렬한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재판이 속개되어 드레퓌스는 파리로 소환되었다. 이후 프랑스 사회는 드레퓌스를 지지하는 자들과 반대하는 자들로 극명하게 구분되었다. 그것은 진보와 보수의 구분이기도 했다. 궁극적으로 드레퓌스는 무죄로 판명되어 군대에 복귀했고, 제1차 세계대전 내내 장교로 복무하다가 육군 중령으로 전역했다.

드레퓌스가 명예를 회복하는 데 졸라가 가장 큰 공을 세웠지만, 언론은 물론 군 내부의 정의로운 사람들도 그 일에 나섰다. 대표적 인물이 조르주 피카르 소령인데, 그는 날조된 증거에 대해 침묵을 지키라는 상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언론에 알렸다. 그 이유로 그도 군법회의에 돌려졌지만, 드레퓌스의 석방과 함께 그도 군에 복귀했다.

소설가 에밀 졸라와 아나톨 프랑스,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 같은 지식인들이 결속하여 양심의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도 이 사건의 한 결실이다. 군부에서는 일개 유대인에 의해 군의 명예가 추락할 수는 없다는 그릇된 자부심으로 재판을 지속시켰다. 그러나 이 사건은 거짓이 참을 이길 수 없음을 증명했다. 해병대 총기 사건과 자살 사건이 있었다. 드레퓌스 사례는 사실이 있는 그대로 밝혀져야 할 당위성을 일깨워 준다.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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