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구 논설위원실장
정치권의 재벌 비판이 한창이다. 특히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이 이 논쟁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정두언 의원은 “재벌은 북한의 세습체제를 능가하는 세습지배구조”라며 “재벌 개혁 없는 선진화란 불가능하다”고 못박기까지 했다. 한나라당 지도부도 재벌 규제를 위한 구체적인 정책 마련에 나섰다.
혼란스럽다.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이 사실상 한 뿌리인 재벌을 손보겠다는 걸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민심의 흐름에 부응하려는 한나라당의 변화를 한갓 정치적 국면전환용이라고 폄하할 생각은 없다. 김성식 의원 등 그동안 꾸준히 당 내부 개혁을 주장해온 몇몇 의원들한테서는 진정성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한나라당의 통절한 반성이 잘 안 보인다. 재벌이 “서민경제를 파탄 내면서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도록 한 게 누구인가. 이명박 정부다. 출범 초기부터 친기업 정책을 표방하고 감세 정책과 고환율 정책 등을 통해 재벌들의 배를 불려 주었다. 그리고 한나라당은 집권 여당으로서 이를 적극 뒷받침했다. 대기업 경제력집중 억제를 위한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에 앞장선 것도 한나라당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마치 자신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는 체하며 친서민 기치를 내걸고 있다. 다 좋다. 내년 총선·대선을 앞두고 국민의 요구를 수용해 친서민 쪽으로 정책을 전환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그동안의 친재벌 정책에 대해 의원 개개인이 아닌 당 차원의 진정성 있는 사과가 선행돼야 했다. 사과 없는 재벌 비판은 한나라당의 부도덕성만 부각시킬 뿐이다.
한나라당이 추진하고 있는 이른바 ‘기업 규제 정책’의 내용은 어떤가. 개별 정책들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것들이긴 하다. 하지만 근본적인 재벌 개혁 정책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현안에 대한 맞춤형 대책을 내놓은 정도다. 계열사 간 내부거래에 대한 증여·상속세 부과 근거를 마련하고, 사업조정제도를 강화하겠다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정부가 내거는 ‘공정사회’의 실현에 써먹기 딱 좋은 대책들이다. 한나라당이 추진하는 이른바 ‘재벌 개혁’은 정확히 이 수준에 머문다.
여당이 지금 시점에서 근본적인 재벌 개혁에 나서기는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재벌과 쌍생아라는 태생적 한계도 있겠지만 집권 후반기라는 시기적인 제약이 크기 때문이다. 더욱이 청와대는 한나라당의 이런 행태를 마뜩잖아하고 있다. 결국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이 과격할 정도의 재벌 비판에 나서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내년 총선·대선을 겨냥한 정치적 구호 수준을 크게 넘어서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재벌 개혁에 대한 한나라당의 진정성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만약 한나라당이 제대로 된 재벌 개혁을 하려면 지금처럼 산만하고 개별적인 대응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 재벌 개혁의 목표와 방향을 분명히 밝히고, 이를 달성할 구체적인 정책 대안들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라는 것이다. 만약 지금 추진하는 게 어렵다면 재벌 개혁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내년 총선 공약으로 내놓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럴 생각이 없다면 말뿐인 재벌 비판은 하나마나다. 시장에서 거론되는 몇몇 현안들에 대해서만 맞춤형 대책을 내놓고 마치 거창한 재벌 개혁을 하는 것처럼 요란을 떠는 것은 국민을 호도하는 짓이다. 더욱이 재벌 총수의 부당한 지배력 행사에는 손도 못 대는 재벌 개혁은 별 의미가 없다.
앞다퉈 재벌 비판을 하기 전에 한나라당 의원들이 먼저 할 일은 따로 있다. 재벌정책과 관련된 정부기관인 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국세청 등이 제구실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물가 안정 주문 한마디에 공정위가 하루아침에 ‘물가안정위원회’로 바뀌는 현실에서 무슨 재벌 개혁을 바랄 수 있겠는가. 이건희 삼성 회장을 ‘원포인트 특별사면’으로 풀어주는 상황에서 아무리 재벌 개혁을 외쳐봤자 공허할 뿐이다. 정부의 공적 기구들이 재벌의 불공정 행위를 규정대로 엄정하게 단속하고, 비리를 저지른 재벌 회장들을 법대로 처벌만 해도 재벌 개혁의 절반은 이뤄진다. 논설위원실장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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