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논설위원
도대체 메르세데스 소사와 조앤 바에즈의 우열을 어떻게 가리며, 마이클 잭슨, 에릭 클랩턴, 엘비스 프레슬리의 순위를 어떻게 정하고, 비틀스와 너바나 혹은 존 덴버와 플라시도 도밍고의 우위를 어떻게 따질 것인가. 어디에든 순위 매기고 우열 가려 돈벌이에 나서는 사람이 있긴 하다. 더 큰 자극을 위해 사자와 호랑이, 레슬링(이노키)과 권투(알리)를 맞붙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얼마나 무모하면, 장르도 다르고 음악세계도 다른 가수들을 줄 세우겠다고 할까.
너도나도 뛰어드는 ‘나는 가수다’ 논평 대열에 뒤늦게 한발 디미는 게 민망하긴 하다. 하지만 남녀노소 장삼이사 한마디씩 하는 판이니 용기를 내본다. 사실 ‘나가수’가 예고됐을 때 ‘해도 너무한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조인트 까이는’ 사장의 등장 이후,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 없다 보니, 기껏 한다는 게 유선방송의 성공한 프로그램 베끼기 같았다. 짝퉁 비난은 피할 수 없으니 방송사 권력을 이용해 성공한 가수를 데스매치에 붙여 말초적 자극을 극대화하자는 심보도 거슬렸다.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처음부터 탈락이 확정된 가수에게 재도전 기회를 주는 반칙을 저질렀다. 경쟁이 얼마나 살벌했고 또 탈락의 낙담이 얼마나 컸으면 그랬을까마는, 스스로 정한 원칙을 처음부터 깼으니 비난은 하늘을 찔렀다. 그런 조삼모사의 기획자나, 사회의 불공정엔 침묵하면서 엔터테인먼트의 불공정엔 아우성치는 관객 모두 오십보백보였다.
나가수 무대를 곁눈질하며 로마 콜로세움을 떠올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가수들은 둘 가운데 하나는 난자당한 주검으로 실려나갈 노예 검투사 같았고, 아우성치는 시청자는 튀는 피와 살 그리고 단말마에 흥분하는 로마 시민을 떠오르게 했다. 실제 가수들은 본래의 쾌활함을 잃고 검투사처럼 비장했다. 병원에서 링거를 맞다가 참석한 사람, 긴장 때문에 손이 펴지지 않는다며 연신 손을 움직이는 사람, 목과 입술이 굳어 있어 연신 입술을 털고 헛기침을 해대는 사람 등 차마 보기 힘들었다. 나가수 폐인이 되어버린 아내와 딸의 시청을 훼방놓은 데는 그런 도덕적 이유도 있었다.
한데 로마의 원형경기장과 다른 점이 하나 있긴 했다. 관람자의 태도였다. 격투기나 축구를 볼 때 나타나는 흥분과 광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선수의 고통에서 쾌감을 느끼고 비명소리에 흥분하는 변태와는 달랐다. 이와는 반대로 이들은 수시로 눈물 콧물 흘렸다. 항상 안타까움과 연민이 흘러내렸다. 음악적 취향이 다를 텐데도, 임재범의 노래에 눈물짓던 이들이 김연우의 노래에도 눈시울을 붉혔다. 희한했다. 오래지 않아 못 이기는 척 두 여자 옆에 눌러앉았다.
무엇이 저 정상급 선수들의 서바이벌 게임을 이슬비 내리는 봄밤처럼 촉촉하게 만들었을까. 무대 위의 긴장은 어찌하여 시청자들의 눈물로 바뀌었을까. 노래의 힘일까? 하지만 그건 아이돌 팬들의 광기, 기획사의 반칙을 설명할 수 없다. 연말 가요무대의 구리고 컴컴한 흑막을 설명할 수 없다.
나름 설명이 가능해진 것은 음원 차트를 보고 나서였다. 최근 탈락자인 김연우의 노래는 5월 3, 4주차 음원 차트에서 정상에 올랐다. 첫 탈락자였던 정엽의 다른 노래들도 탈락 이후 음원 차트 상위권에 올랐다. 재도전으로 구설에 올랐던 김건모의 노래 역시 2위였다. 시청자들은 1등만 기억하는 게 아니라 꼴찌를 더 기억했고, 1등에게만 환호하는 게 아니라 꼴찌의 열정과 노력에 깊은 위로와 박수를 보냈다. 우열을 따지는 게 아니라 각자의 음악세계 속으로 빠져들었고, 서열을 매기는 게 아니라 아픔의 깊이를 헤아렸다.
제작자는 용호상박의 싸움판을 기획했지만, 시청자들은 감동의 어울림으로 바꾸었고, 제작자가 꿈꿨던 별들의 전쟁을 모두가 함께 빛나는 별 밤으로 만들었다. 그건 살풍경한 경연이 아니라 절정의 협연이었다. 그런 전환을 이뤄낸 시청자 혹은 시민 혹은 유권자들이 만들어낼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상을 생각해본다. 슈스케의 허각, 위대한 탄생의 백청강을 세운 이들이니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마음이 괜히 후둣해진다.
논설위원 chankb@hani.co.kr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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