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동로마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황제였다. 그의 치하에서 제국의 국경이 안정되었고,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로마법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아내 테오도라가 없었다면 그의 모든 업적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었다. 테오도라는 서커스에서 곰을 조련시키던 집안 출신이었다. 당시 서커스에서는 에로틱한 연기는 물론 매춘까지도 해야 했다. 당연히 결혼에는 반대가 따랐지만 그것을 무릅쓰고 결혼하기로 한 결정은 분별력 있는 대제의 삶 속에서도 가장 분별력 있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532년 콘스탄티노플의 원형경기장에서 전차 경주를 벌이다가 경쟁 관계에 있던 두 파당의 과열된 응원이 폭동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니카폭동’이다.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던 사람들이라서 무기를 갖고 있던 이들은 경쟁을 접고 황제에 대한 폭동에 가세했다. 폭동은 원형경기장을 벗어나 도시 대부분을 파괴하고 수천명을 죽이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기세에 눌려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를 포기하고 도피하려고 생각했다. 이때 테오도라가 나섰다. “황제의 자주색 옷은 영광된 수의”라고 말하며,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사는 것보다는 통치자로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역설했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감동했고, 힘을 얻은 황제는 분산된 병력을 재규합하여 폭동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었다.
우리는 당시대의 대표적인 역사가 프로코피우스가 쓴 <유스티니아누스의 전쟁>을 통해 용감하고 총명한 황비의 이러한 면모를 접한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바로 그 프로코피우스가 <비밀스런 역사>라는 비공식적인 책에서는 테오도라의 어두운 과거를 들춰내며 인신공격에 가깝게 비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는 그 책이 “글로 된 모든 기록 중에서 가장 저열하고 가장 중상모략에 가득 찬 인격 살해”라고까지 말한다. 아무리 유능한 황비라 할지라도 성적 차별과 사회적 차별을 넘어서기는 어려웠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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