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구 논설위원실장
나라가 갈기갈기 찢기고 있다.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한국토지주택공사(LH) 본사 이전,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입지 선정 등을 둘러싸고 영남, 호남, 충청 등 지역간 갈등이 심각하다. 아예 사생결단을 하겠다는 태세다. 이전에는 좀처럼 보지 못했던 격한 반응들이다. 겉으로만 보면 영락없는 밥그릇 싸움이다. 내 먹을 것을 달라는, 나는 아직 배고프니 더 내놓으라는, 생존을 위해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처절한 절규가 난무한다.
왜 이런 갈등이 극단적인 양상으로 번지게 됐을까. 직접적으로는 분명한 원칙과 투명한 절차 없이 국책사업을 민심 달래기용으로 이용하려 했던 정부의 책임이 크다. 표를 의식한 국회의원들과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정치적 의도도 갈등 증폭에 한몫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국책사업 유치에 죽자사자 매달리는 이유는 그것이 해당 지역의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뒤집어 보면 지방마다 먹고살 거리, 즉 제대로 된 공장이나 대기업 등이 없다는 방증이다. 이는 박정희 정권 이후 지속된 수도권 집중으로 지방의 피폐화가 한계에 다다랐음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먹을거리 내놓으라고 삭발하고 혈서 쓰는 지방 정치인과 주민들만 탓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국책사업 하나 더 유치한다고 먹을거리 문제가 해결될까. 수도권과 지방 사이의 불균형을 근본적으로 완화하지 않고는 언 발에 오줌 누기다. 적당히 떡 하나 더 얹어주는 식으로 무마하려 해선 사태만 악화시킬 뿐이다.
불균형 심화가 만들어놓은 폭탄은 우리 사회 곳곳에 널려 있다. 수도권과 지방뿐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기업, 대형 유통업체와 영세 자영업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부유층과 서민계층 간의 격차는 굳이 구체적 수치를 들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벌어졌다. 양극화 현상이 수년 전부터 사회문제화됐지만 완화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다. 그 불균형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하면 결국 폭발할 것이다. 최근 격화하고 있는 지역갈등은 그런 조짐의 시작이다.
대자연의 불균형이야 홍수나 지진, 화산 폭발 등을 통해 자연스레 치유되지만, 인간세상의 불균형은 인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면 더 악화하기 십상이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탐욕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불균형이 심화해 임계점을 넘어서면 공동체 자체에 막대한 타격을 주는 방식으로 억압된 에너지를 분출한다. 그것은 정치·사회 쪽에서는 혁명이나 폭동으로, 경제 측면에서는 경제위기나 대공황 등으로 표출되곤 한다. 계속되는 아랍권 나라들의 민주화 열풍이나 2008년의 세계금융위기 등도 비슷한 맥락에서 나타난 현상들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경제 상황도 그런 쪽으로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다.
사실 해법은 이미 나와 있다. 편중 인사 완화, 수도권 비대화 억제, 대기업 집중 완화, 부자 감세 철회 등을 통해 양극화의 간극을 줄이면 된다. 소수 최상위층의 소득 증가를 억제하는 대신 다수의 중산층 소득을 늘리는 것도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는 방법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모든 게 거꾸로 갔다. 집권 수구세력과 재벌, 그리고 그들과 이해를 함께하는 소수 부유층은 우리 사회의 정치적 물적 자원을 독차지하면서 주머니를 불려왔다. 그 뒷전에서는 차라리 ○○공화국을 만들자는 한탄이 쏟아지고, 문닫는 영세상인이 속출하고, 중산층이 하루아침에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도덕이나 시혜 차원에서의 균형이나 나눔을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지금 같은 속도로 불균형이 심해지면 머지않아 공동체 자체가 무너진다. 그리되면 많이 가진 자들이 더 많이 잃게 되는 게 세상 이치다. 지속적인 정치·사회적 안정과 경제성장을 원한다면 각 분야의 불균형을 시급히 완화해야 한다. 어쩌면 그로 인한 과실도 기득권층이 더 많이 가져갈지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더 늦기 전에 부풀려진 ‘부자 주머니’의 바람을 빼고, 쪼그라든 주머니에 따스한 공기를 채워넣어야 할 때다. 빵빵해진 부자 주머니가 터져버리기 전에.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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