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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사람] 어떤 사제지간

등록 2011-05-16 23:09

조한욱/한국교원대 교수
조한욱/한국교원대 교수
세기말 오스트리아의 빈에 그림에 대단한 열정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청년이 있었다. 에곤 실레였다. 일찍 부친을 여읜 그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빈의 예술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지속할 수 있었으나 보수적인 학풍에 좌절했다. 그는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영감을 줄 스승을 스스로 찾아 나섰다. 그렇게 그는 1907년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났다.

클림트는 1890년대부터 예술의 새로운 운동을 주도했다. 창의적인 젊은 예술가나 외국인 화가의 전시회를 주선했고, 그들의 작품을 소개할 잡지도 간행했다. 1894년 빈대학 강당의 천장화를 위촉받은 그는 20세기 초에야 <철학> <의학> <법학>이라는 삼부작을 완성시켰다. 클림트는 전통적인 상징을 과감하게 성적으로 표현했고, 그것이 외설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삼부작은 전시되지 못했고 나치에 의해 파손됐다.

실레가 찾아왔을 당시 클림트는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다나에> <키스>와 같은 작품들로 대표되는 이른바 ‘황금빛 단계’를 완성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경황에도 클림트는 실레의 재능을 곧 알아보고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실레의 그림을 구매하기도 하고, 자신의 그림과 교환하기도 했다. 모델도 구해주고 후원해줄 전망이 있는 사람도 소개해줬다. 클림트가 관련된 예술가 집단에 가입시키기도 했다. 클림트는 1909년 빈에서 개최된 전시회에 실레의 그림을 초대했고, 실레는 그곳에서 뭉크나 고흐의 작품을 접했다.

이런 도움을 통해 실레는 점차 전통적인 인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영역을 개척하게 되었다. 그는 인간의 외면적 형상뿐 아니라 내면적 성정까지도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스로도 많은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지만, 오늘날 실레는 클림트를 포함한 그 누구와도 다른 자신의 화풍을 만들었다고 인정받는다. 그것은 실레의 천재성과 그 재능을 알아본 클림트의 안목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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