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살부터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읽고 감화를 받은 한 소녀가 그 책에서 얻은 철학적 신념을 평생 추구할 이상으로 간직하고 살아갔다. 국가는 국왕의 이익이 아닌 국민의 복지를 위해 존재하며, 모든 국민은 국가에 대한 책임감을 함께 나눠야 한다는 것이다.
1781년 그는 스무살 이상 차이가 나지만 지적 수준이나 지향점에 있어 자신과 동류라고 느낀 장마리 롤랑과 결혼하여 롤랑 부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부부는 리옹에서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는 글로 관심을 얻다가, 1791년 파리로 이주했다. 부인의 살롱은 브리소, 로베스피에르 같은 인물이 모여 시민의 권리를 논하는 장소가 되었다. 남편의 지위가 오르면서 부인의 영향력도 커졌지만, 부인은 공식적으로 앞에 나서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남편의 연설이 부인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혁명이 격해지며 혁명세력 내부에도 균열이 생겼다. 온건파인 지롱드당에 속한 부부는 1792년 과격파인 자코뱅당에서 탈당했다. 혁명이 과격한 양상으로 바뀌는 것에 대해 남편이 반대하자 이 부부는 점차 곤경에 처했다. 결국 롤랑 부인은 가까스로 남편을 루앙으로 도피시킨 뒤 1793년 6월 수감되었다. 반역뿐 아니라, 여성의 역할을 배신하고 ‘범한’ 정치적 행동이 죄목이었다. 간수들까지도 그를 존경했다.
플루타르코스와 볼테르와 루소의 이상에 끝까지 충실했던 그는 1793년 11월8일 기요틴에 올랐다. 목과 몸이 분리되기 전 남긴 유명한 말은 아직도 회자된다. “자유여, 그대의 이름으로 어떤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는가!” 그 소식을 들은 뒤 남편은 루앙의 오솔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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