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논설위원
독한 분이나 잘난 분이 이런 말 들으면 기분 나쁘겠다. 돌아서면 바로 다른 말 하고, 검은 것 희다 우기는 분들이라면 속은 더욱 뒤틀리겠다. 가차없이 뒤통수를 치거나 인정사정없는 배반과 냉혈로 승승장구했던 터라, 도대체 착하다느니 이타적이라느니 하는 말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 제 삶을 온전히 부정하는 결과가 되는 탓이다.
그러나 낙화를 지켜보며 회한을 씹는 날은 뜻밖에도 빨리 오기 마련. 아마도 4·27 재보선은 그때를 알리는 신호였던 것 같다. 반칙과 암수로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한 분은 이제 직계라는 자들마저 배반 때리며 자신에게 침 뱉는 꼴을 속절없이 지켜봐야만 한다. 안에서만 연승, 밖에서는 연패를 했던 다른 한 분은 이미 큰 죄를 지었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깊은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집안 대표를 세우는 과정에서 보인 극악스런 언설로 말미암은 상처가 이제 와 켕겼는지 모르겠다. 오늘을 대표하는 정치권의 두 왕따다.
사실 오늘 주제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위 두 부류의 인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그는 대의를 위해 지는 싸움을 한번도 피하지 않았다. 이웃의 선의를, 그것이 깰 때까지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어떤 편법도 거부했다. 최종학력 고졸로서 사법시험까지 합격했지만, 바보란 별명이 붙은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유권자들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항상 부채감이 따랐다. 마지막 승부에서 선의가 깨어난 것은 그 때문이고, 결국 그는 이겼다. 퇴임 뒤 후임자의 반칙에 떠밀려 세상을 떴지만, 2주기를 앞둔 지금 그는 생전보다 오히려 더욱 뚜렷한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요즘 경제학계에서는 이타적 인간이 이기적 인간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시도가 널리 이뤄지고 있다. <한겨레>와 인터뷰했던 미국 샌타페이연구소 새뮤얼 볼스 교수나 그의 제자 최정규 교수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2007년 이타적 본성에 관한 공동 연구논문을 세계적 과학잡지 <사이언스>에 싣기도 했다. 인간의 이기심보다 공정과 정의를 중시하는 호혜적 이타성이 인간 행동의 더 큰 동기유발 요인이 된다는 게 이들의 결론이다.
갑에게 1만원을 주며 을과 나눠 갖되 갑의 제안을 을이 거부하면 둘 다 한 푼도 갖지 못하도록 했다(최후통첩게임). 경제학이 말하는 합리적(이기적) 인간이라면 을은 갑이 단돈 1원이라도 주면 받는 게 이익이다. 1원이라도 생기면 그만큼 이득이고, 그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을은 갑이 평균 30% 이하를 제안할 경우 이를 거부했다. 갑은 평균 37%를 을에게 제안했으며, 절반을 제안한 사람이 가장 많았다. 이득 여부를 떠나 공정하지 않거나 정의롭지 않은 경우를 거부하거나 피했던 것이다. 이번엔 을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전제 아래, 배분 비율을 두 가지(10%와 50%)로 한정했다(독재자게임). 갑의 성격을 좀더 세밀하게 관찰하기 위한 것이었다. 갑은 여기서도 50% 쪽을 선택한 경우가 압도적 다수(76%)였다. 우월적 지위에서도 정의나 공정성의 잣대는 변하지 않았다.
이 실험은 인간 행동의 동기 가운데 이타적 요인의 비중을 따졌다. 정치학자 로버트 액설로드 교수(미시간대)는 사회나 개인을 위해 경쟁과 협력 중 무엇이 더 이로운지 따지는 실험을 했다. 변형된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적용한 조사를 통해 그가 내린 결론은 단연 협력이었다. 이를 근거로 그는 이렇게 충고했다. 굳이 오래 살 생각이 아니라면 협력하지 말라. 사람을 두 번 다시 보지 않겠다면 배반하라. 그러나 그 밖의 상황이라면 무조건 협력하라. 착한 사람이 결국 이긴다.
독하거나 잘난 두 분, 아직 때가 늦지 않았다. 선의를 믿고 협력하면 개인과 집단의 발전에 기여할 시간은 충분하다. 당장은 이웃들이 기피할 것이다. 하지만 준 만큼 받겠다는 자세로 손해를 각오하면 상처받은 이웃도 손을 내민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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