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학의 기원은 중세 유럽에 있다. 당시 설립된 많은 대학 중에서 파리대학은 12세기에 지적 활동의 중심지였다. 역사가들은 언제나 ‘왜’를 묻고, 그 대답을 대체로 정치·경제·사회적 요인을 통해 구조적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이 문제에서 권위 있는 서양사의 한 개설서는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논객인 피에르 아벨라르라는 개인의 영향을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서술한다. 강의를 뛰어나게 잘해 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앞서가는 신학적 견해에서 이단의 냄새가 풍기자 당국에서는 프랑스 ‘땅’에서 강의를 금지했다. 그러자 그는 나무 위에 올라가 몰려든 학생들에게 강의했다. 곧 프랑스 ‘하늘’에서 강의하는 것도 금지했다. 그가 센강에 배를 띄우고 강의하자 학생들이 강둑으로 몰려들었다. 스승들을 포함하여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토론에서 굴복시키고 스콜라 철학의 바탕을 세워놓은 업적으로 인정받는 아벨라르였다.
하지만 대다수 서양 사람들은 그를 순애보의 주인공으로 기억한다. 학문적으로 정상에 올랐던 아벨라르는 스물한살 아래의 엘로이즈와 가정교사와 학생의 자격으로 만나 사랑에 빠졌다. 육체적 사랑의 결실은 엘로이즈 가문의 불명예를 뜻했고, 결국 엘로이즈의 삼촌은 아벨라르를 거세했다. 수도원으로 도피한 아벨라르는 <나의 불행 이야기>라는 고백서를 썼고, 수녀원에 들어갔던 엘로이즈와 113통의 편지를 교환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그들 사랑의 세세한 전모를 안다.
아벨라르는 지적 오만과 육욕으로 받은 징벌의 적절함을 인정했다. 엘로이즈는 그의 시신을 거두고 20년 동안 무덤을 지킨 뒤 그의 곁에 누웠다. 그들의 무덤은 연인들의 순례 장소이다.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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