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사람(史覽)] 어느 아나키스트의 죽음

등록 2011-04-27 19:42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는 야라강이 흐른다. 야라강둑에는 큰 공원이 있어 런던의 하이드파크와 비슷한 기능을 한다. 그곳에 약 60㎝ 높이의 연단을 만들고 느릅나무 아래서 낡은 펠트 모자를 쓰고 근 60년에 걸쳐 핍박과 체포와 구금을 무릅쓰며 일요일마다 노동자와 실업자를 위해 연설을 했던 인물이 있다. 존 윌리엄 플레밍이라는 아나키스트였다. ‘처미’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는 영국에서 태어났다. 20살이 되던 1884년 삼촌의 초청으로 오스트레일리아에 온 그는 호구지책으로 부츠를 만들며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그는 노동조합장에 선출되었고, 멜버른에서 최초로 노동절에 노동자의 시위행진을 성사시켰다.

그렇지만 그는 야라강둑의 연설로 가장 유명하다. 그의 연설은 아나키스트답게 점진적 개혁보다는 즉각적인 혁명을 촉구하는 내용이 많다. “노동자들은 의회에서 그들의 권리를 결코 기대할 수 없다”던 그는 멜버른에서 무정부주의를 끝까지 몰고 나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미래에 거둘 씨를 뿌린다”는 마음으로 행동했다. 말년엔 그런 낙관마저 잃었어도 연설은 계속했다.

플레밍은 1950년 1월25일에 사망했다. 소원에 따라 그의 주검은 화장했다. 석 달이 지난 4월 말 친구들은 플레밍이 유골을 노동절에 야라강에 뿌려달라고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들은 유골을 분실했다. 한 친구가 말했다. “어떤 재든 상관없잖아?” 다른 친구가 말뜻을 알아채고 5월1일에 재 한 통을 갖고 왔다. 야라강가에서 뿌린 한 줌의 재가 군중들 위로 날아 멜버른의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끝까지 자신의 강령에 충실했던 플레밍은 이렇게 노동절 행사에 마지막으로 참가했다.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은 왜 이리 구차한가 1.

윤석열은 왜 이리 구차한가

헌재에서 헌법과 국민 우롱한 내란 1·2인자 2.

헌재에서 헌법과 국민 우롱한 내란 1·2인자

‘-장이’와 ‘-쟁이’ [말글살이] 3.

‘-장이’와 ‘-쟁이’ [말글살이]

‘내란 청문회’ 증언, 모두 윤석열을 가리킨다 [1월23일 뉴스뷰리핑] 4.

‘내란 청문회’ 증언, 모두 윤석열을 가리킨다 [1월23일 뉴스뷰리핑]

내란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세상읽기] 5.

내란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세상읽기]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