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논설위원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고,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건 이기적 욕망이다. 인간의 경쟁은 본능적이다. 경쟁은 개체와 사회를 강하게 만든다.’ 학교 교육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우리는 이렇게 배우며 자란다. 학교 교육은 이것을 반복 학습으로 내면화하도록 만든다. 동시에 이를 체질화하는 실전의 장이기도 하다. 영어 경쟁 등을 도입해 경쟁의 강도를 부단히 높이기도 한다.
경쟁은 공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경쟁은 겉보기와 달리 시작부터 승부가 상당부분 결정된다. 수능시험 등 지필고사 성적이 학생 개인의 능력보다 그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더 잘 반영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르바이트에 녹초가 되는 학생이 족집게 선생을 데려다 공부하는 학생과 정상적인 경쟁을 한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사실엔 아예 눈을 감아 버린다.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른 격차를 더 넓히려는 조처만 계속 나온다. 부모 덕에 해외 여행·연수·유학을 다닐 수 있었던 아이들과 영어학원조차 가기 힘든 아이들이 영어를 놓고 경쟁하도록 하는 게 그것이다. 이제 정부는 영어능력시험을 국가 주도로 치르도록 불공정을 제도화했다. 사회경제적 배경이 부실한 학생들은 조기에 탈락하기 십상이고, 그러면 그들은 이 사회의 일개미 집단이 되어 버린다.
경쟁을 통해 획득된 결실이 분배되는 구조는 이보다 더 기묘하다. 판돈은 경쟁한 주체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승률 조작이나 반칙 등을 통해 도박판의 판돈이 하우스를 관리하는 조폭들에게 돌아가듯이, 경쟁의 결실은 이 경쟁을 기획한, 보이지 않는 손에게 돌아간다. 경쟁자는 승리해도 당근 몇 뿌리 더 받아먹는 경주마 신세나 다름없다. 카이스트의 자살한 박아무개 교수는 지난해 올해의 최우수 교수로 선정됐다. 경쟁 사다리의 상층부까지 올라갔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몇 푼 안 되는 연구비 유용 의혹을 받게 됐고, 명예나마 지키기 위해 평생 기어올랐던 사다리에서 밑으로 몸을 던졌다.
서남표 총장 같은 사람이 가져가는 것도 아니다. 그 역시 경주마일 뿐이다. 그는 경쟁지상주의 정책을 통해 학교 서열을 높이고, 시장지상주의자들로부터 대학 개혁의 전도사라는 칭찬도 받았다. 의혹은 있지만 성과급도 몇천만원씩 챙겼다. 그러나 사다리 꼭대기에서 보면 그도 대학 서열 경쟁을 위해 학생과 교수를 닦달하는 중간관리자일 뿐이다. 이를 통해 경쟁의 사다리를 한 계단 더 오르려는 경쟁자의 한 사람이다. 박 교수보다 사다리를 한 칸 더 올라가긴 했지만, 언제든 사다리에서 떨어질 수 있다. 이미 전과목 영어교육, 징벌적 등록금제라는 원시적인 경쟁유도 정책의 종언과 함께 그의 효용가치는 사라졌다.
산업혁명 때 기계식 제분기가 등장하면서 전통적인 방앗간들은 대거 몰락했다. 실업자가 쏟아져 나왔고, 농촌 공동체는 파괴됐다.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당시 시집 <밀턴>의 서시에서 이 제분기를 악마의 맷돌에 비유했다. 당시 각종 풍속화는 기계식 방앗간 지붕에 웅크리고 있는 악마를 그리곤 했다. 20세기 초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악마의 맷돌을, 당시 대두하던 시장근본주의 행태를 설명하는 데 이용했다. 본원적 요소인 인간(노동), 자연(토지), 구매력(화폐)까지 시장근본주의는 매매와 투기의 대상으로 시장에 밀어넣고 갈아버린다는 것이다. 블레이크나 폴라니에게 악마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자본이었다.
시장근본주의의 맷돌을 돌리는 동력은 경쟁 교육이다.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편협한 규정에 근거해 정글의 경쟁을 강화한다. 거듭된 시장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시장근본주의 맷돌이 돌아가고 있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오히려 인간을 통제하는 자본은 경쟁 교육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시장근본주의를 유지 강화한다. 그는 학생들을 악마의 맷돌 속으로 밀어넣는 서 총장의 머리 꼭대기에도 있고, 경쟁 이데올로기의 전도사인 족벌신문사의 윤전기나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돔 위에도 웅크리고 있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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