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논설위원
피지도 못한 채 청춘이 시들거나 죽어간다. 다닐 형편도 아니면서 왜 진학했나!라는 빈정거림에 참았던 아우성이 대학 교정 밖으로 터져 나온다. 그 앞에서 엉뚱한 트로트 하나 흥얼거렸으니, 나도 내가 기가 막혔다. 이젠 노년도 잘 부르지 않는 흘러간 노래, “청춘을 돌려다오, 젊음을 돌려다오”로 시작해 “청춘아 내 청춘아 어딜 갔느냐”로 끝난다. 황혼에 청춘을 애걸하는 거야 나무랄 수 없지만, 새파란 청춘 앞에서 ‘돌리도’ 타령을 했으니, 회로 상태를 의심받아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변명 좀 해야겠다. 지금이야 그 영광이 쇠락했지만, 일명 ‘돌리도’는 1980년대 중반부터 10여년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1967년 신세영씨가 처음 취입했고, 1983년 신인 현철씨가 되살렸고, 이듬해 뽕짝 국민가수 나훈아씨도 제 레이블에 올린, 2부 리그 국민가요였다. 기름밥에 찌든 젊은 순이와 돌이도, 이들과 함께 사회 변혁을 꿈꾸던 위장취업자들도, 돌아보면 파란만장하고 앞을 보면 더 막막할 때 이 노래를 읊조렸다. 생활고와 역사의 격랑에 무참히 휩쓸려가는 청춘이 안타깝지 않을 사람 누굴까. 젊은 놈이 그렇게 할 일 없느냐는 타박도 있겠지만, 그것 역시 안타까움의 표시였다.
당시 청춘이야 무채색. 무지개색인 요즘 청춘과 비교할 바 아니다. 진로와 기회도 많아졌고, 즐길 것도 많다. 연애, 애정표현 모두 자유롭다. 소득의 총량은 수십배 늘었다. 사회적 문제로 결단을 요구받는 일도 없다. 그러니 얼마나 찬란한 청춘인가. 하지만 그건 때깔뿐. 속으론 썩어 짓무른다.
가정에선 생활비만 축내는 백수, 사회에선 눈높이만 높은 건달. 기업이나 학교재단엔 그저 만만한 소비자이거나 값싼 노동력이다.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 정도라야 인정받는다. 반면 한 세대 전엔 대학생인 것만으로도 선택받은 자라는 부채감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과 공동체에 보답할 길을 고민해야 했다. 어른도 제 자식 거리로 나서는 건 극구 말렸지만, 학생들의 고민과 실천을 존중했다. 적어도 돈 때문에 데모하지는 않았다.
요즘 학생들을 이승과 저승의 담장 위로 떠민 건 바로 그 궁색한 돈이다. 하숙비는 물론 학생식당 밥값까지도 부담스러워졌으니, 800만~1000만원 등록금이 그렇게 만든 건 당연하다. 대학생 88.6%가 등록금 마련에 고통을 당하고, 60%가 자살충동을 느낀다고 한다. 유엔경제사회국 청소년보고서에서 대학생 자살자는 한국이 수년째 세계 1위를 차지한다. 30분 피자배달에 뛰어들었다가 죽은 학생, 역시 키스방·룸살롱으로까지 내몰린 학생들의 정신적 죽음까지 합친다면 그 수는 훨씬 많다. 학자금 신용불량자는 2007년보다 지난해 6.75배로 늘었다. ‘돌리도’를 절규할 사람은 바로 오늘의 청춘이다.
문제의 중심엔 등록금이 있다. 형편도 안 되는 게 대학엘 왜 다니느냐고 빈정거리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고졸은 열외인간이다. 평생 가난과 소외의 굴레를 써야 한다. 90%에 육박하는 진학률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적 상위계층 10%를 제외하고는 대학생 1명을 키우는 게 벅차다. 취업·임금·진급에서 대·고졸 차별을 혁파하거나 학비를 대폭 줄이지 않는다면, 등록금은 청춘의 고엽제다.
문제는 애원한다고 흔들릴 정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편으론 가계를 쥐어짜 돈을 벌고, 다른 한편으론 전문노동력을 값싸게 공급받고, 권력과 부의 대물림을 용이하게 해주는 체제인데 어떤 부자 정권이 이를 포기할까.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 서열과 경쟁의 올가미를 어떻게 채웠는데 순순히 풀어줄까….
프랑스 68학생혁명의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성과는 학벌, 서열, 고액 등록금의 혁파였다. 서열 대신 생정평자복공행의 가치를 삶 속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 때가 되면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 맺어야 종족 번식이 이뤄진다. 청춘이 꽃피지 못하면 사회는 살아남지 못한다.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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