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주 언론인
최시중과 안성열. 1970년대에 <동아일보>에서 정치부 기자를 지낸 두 사람은 연배도 비슷하다. 그러나 살아온 길은 참으로 다르다.
지난 3월17일. 이명박 정권의 권력 서열 3위라는 최시중씨는 방통위 위원장 연임과 관련한 청문회 자리에 섰다. 같은 날 아침, 서울의 한 병원 장례식장에는 36년 전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된 안성열 선배의 빈소가 마련되었다. 자유언론 투쟁에 적극 참여한 그는 75년 봄에 해직되었으며, 78년 가을 10명의 동아투위(동아일보사 해직언론인 모임) 위원들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을 때 그중 한 명이었다.
같은 날 낮 서울 세종로 동아일보사 앞에서는, 유신정권이 압살해버린 자유언론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다 36년 전 이날 새벽 동아일보사가 동원한 술 취한 폭력배들에게 두들겨 맞으며 쫓겨난 동아투위원들이 모여 다시 목쉰 소리를 외쳤다. ‘3·17 언론학살’에 대한 국가와 동아일보 책임이 백일하에 드러난 이상 지체 없이 사과하고 보상하라고.
이런 고통과 한이 담긴 3월17일에, “이 나라 언론자유를 살처분한 인물”(천정배 민주당 의원)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최시중씨가 청문회 자리에서 돌연 ‘언론자유의 투사’ 행세를 했다. “독재정권에 항거”했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일부 언론이 제가 언론자유를 억압한 당사자라고 비난한 것을 보며 비탄한 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며 울먹이기도 했다. 전병헌 민주당 의원은 그의 눈물을 가리켜 ‘악어의 눈물’이라 비꼬았다.
김재윤 민주당 의원은 “독재정권 항거” 운운한 그를 빗대어 “광주 학살한 전두환 대통령과 골프 치면서 전 대통령이 부동산 개발 정보 주던가요?”라고 힐난했다. ‘부동산 개발 정보’ 대목은 최씨가 동아일보 기자 시절 매입한 전국 부동산 리스트와 관련된 것이었다. 김 의원은 부동산 목록을 열거하면서 “기자 당시 1500만원 내외 연봉으로 이렇게 많은 부동산을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따졌다.
이런 야유와 비판을 받은 최시중씨와 달리 그의 정치부 기자 동료였던 안성열 선배는 70년대 그 엄혹한 시절, 자유언론을 위한 투쟁에 적극 참여했다. 대부분의 정치부 기자들은 자유언론 투쟁에 매우 소극적이었는데, 안성열 선배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최시중씨는 그 치열했던 자유언론 투쟁의 현장에 없었다.
더욱이 그가 지난 3년간 무슨 짓을 해왔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나의 한국방송(KBS) 사장 강제해임과 그 이후의 방송장악을 비롯하여 이 땅의 방송과 언론 환경, 표현의 자유가 황폐해지는 과정에 그가 어떤 구실을 했는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다. 나의 경우,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그는 2008년 봄, 한국방송의 김금수 이사장을 만날 때마다 “정연주 때문에, 한국방송 때문에 정치를 못 해 먹겠다”며 ‘나의 퇴진’을 강하게 요구했다.
그해 여름 그는 대책회의 성격의 비밀회동에 늘 핵심이었다. 6월9일 이명박 대통령,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과 함께한 청와대 안가 모임, 내가 해임되던 날 아침인 8월11일 서울 롯데호텔 비밀회동(정정길 청와대 비서실장,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 나경원 한나라당 제6정조위원장, 김회선 국정원 제2차장(국내담당)), 바로 며칠 뒤인 8월11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한 한국방송 후임 사장 선정을 위한 면접 성격의 비밀회동(정정길 비서실장, 이동관 대변인, 유재천 한국방송 이사장, 김은구 전 한국방송 이사 등 3인)에 그는 늘 있었다.
동아일보 기자 시절 사들인 여러 부동산과 골프회원권 5개 등 최시중씨의 등록 재산은 74억3000만원. 그는 “이렇게 자산이 많은 줄 지난 청문회 때 보고 알았다”고 했다. 이 정권 권력 3위라는 인물의 생얼굴이다. 바로 이 정권의 생얼굴이기도 하다. 천정배 민주당 의원은 그에게 얽힌 여러 의혹들을 거론하면서 (언론자유뿐 아니라) “도덕성마저 살처분한 분”이라 했다.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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