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가 넘쳐나던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가장 걸출한 천재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미란돌라 백작 조반니 피코를 꼽겠다. 그는 스물셋의 나이로 철학과 신학과 과학에 관한 900개의 논제를 제시하고, 유럽의 어느 학자라도 로마로 와서 공개적으로 토론을 벌인다면 모든 비용을 대겠다고 언명했다.
선구적 이론은 기존의 눈에 위험해 보이니, 그의 논제에서 이단의 혐의를 발견한 교황청의 개입으로 도전은 무산됐다. 900개의 논제를 보충하기 위해 집필한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연설>이라는 소책자는 인간의 능력과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했다는 르네상스 시대의 ‘매니페스토’로 인정받는다. 그는 과격한 개혁가 사보나롤라를 추종했고, 그에 불만을 품은 비서에 의해 독살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1494년 서른하나의 나이였다.
그 연설문에서 피코는 예로부터 인간의 존엄을 얘기해온 고대의 헤르메스나 아랍인 압달라를 반박한다. 그들은 신과 하급 동물 사이의 중간자로서 인간이 갖는 존엄성을 논했지만, 그것은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피코에게 인간의 존엄성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에 있다. 생존만 원하면 식물처럼 살 수 있고, 감각만 원하면 동물처럼 살 수 있고, 지성을 사용하면 천사가 될 수 있다. 더구나 영혼이 신과 합치되어 통일을 이루면 신의 위치에 오를 수도 있다. 그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인간을 카멜레온이라 부르며, 그는 “누가 그를 찬양하지 않겠는가?”라 외쳤다.
피코가 우리의 시대에 살았다면 자신의 논지를 보충했을 것 같다. 생존을 외면하고, 감각을 회피하고, 지성을 경멸하고, 영혼이 마비된다면 그 카멜레온은 마왕의 자리에 설 수도 있다고.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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