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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연주 칼럼] 대통령의 말

등록 2011-02-20 18:25수정 2018-05-11 15:41

정연주 언론인
정연주 언론인
1988년 여름, 조지 부시가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었다. 그는 전당대회에서 수락연설을 하는 도중, 갑자기 뜸을 들이더니 “내 입술을 보라”(Read my lips)고 했다. 그러고는 “증세 절대 불가”(No new taxes)를 외쳤다. 함성과 박수가 대회장을 뒤흔들었다. 수많은 미국인들 뇌리에 이 여섯 단어는 깊이 각인되었다. 부시는 그해 대선에서 승리했다.

사실 당시 미국 재정 상태에서는 증세가 불가피했다. 보수 혁명의 기치를 내걸었던 레이건은 집권하자마자 부자 감세와, ‘최강 미국’을 내세우며 국방비를 크게 늘리기 시작했다. 나라 재정은 급속히 악화되어, 레이건 집권 8년 뒤 연방 재정 적자와 국가부채는 세 배나 늘어났다. 재정 건전성을 위해 증세가 절박하게 요구되는데도 부시는 ‘증세 불가’를 핵심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대통령이 된 뒤 재정 상황이 더 악화되자 부시는 결국 증세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의 말 뒤집기는 엄청난 정치적 후폭풍을 몰고 왔다. 코미디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등 국민적 조롱거리가 되었고, 1992년 연임에 나섰지만, 젊은 빌 클린턴 후보에게 맥없이 무너졌다. 여러 패배 요인이 있었지만, 말 뒤집기는 부시의 신뢰성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

‘아버지’ 부시에 이은 ‘아들’ 부시와 그 주변 인물도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다. 이라크 민간인 사망자 10만명, 미군 사망자 4000여명 등 참혹한 재난이 된 이라크 침공은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미국의 거짓 주장으로 시작됐다. 체니 부통령은 “사담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 보유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공언했고, 부시 대통령은 2002년 새해 연설 때 한술 더 떠 “사담 후세인이 아프리카로부터 대량의 농축 우라늄을 획득하려 했다”며 거짓을 확대시켰다. ‘아들’ 부시는 그 뒤 미국 역사학자들에 의해 ‘역대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대통령이건, 대통령 후보이건, 그가 하는 말은 천근의 무게를 갖기 마련이다. 그것은 바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좌우하는 정책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너무도 쉽게, 가볍게 자기가 한 말을 뒤집어 버린다. 그러고는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 무슨 말인들 못하느냐는 투의 말을 변명이라고 한다.

“저는…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인터넷 금융회사를 창립을 했습니다… 금년 1월 달에 BBK라는 투자자문회사를 설립을 하고, 이제 그 투자자문회사가 필요한 업무를 위해서 사이버 증권회사를 설립을 하기로 생각을 해서… 며칠 전에 예비허가가 나왔습니다.”(2000.10.17. 광운대학교 최고경영자 강연)

“중도에 계획을 바꾸는 것은 옳지 않다. 행복도시를 행정기능과 함께 과학·산업·문화 등의 기반시설이 함께하는 자족능력을 갖춘 도시로 육성할 것이다.”(2007.8.2. 오송역 방문)

“제가 대통령이 되면 행복도시가 안 될 거라고 하지만, 저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다.”(2007.11.27. 대전 유세)

“대덕과 오송을 연계해 충청권에 국제과학비즈니스 도시를 건설하겠다.”(2007.9.12. 지역기자 간담회)

그렇게 굳세게 했던 말들이 그 뒤 어떻게 뒤집어졌는가. 대통령의 말이 천근은커녕 깃털 무게만도 못하게 되고, 그래서 무슨 말을 해도 믿지를 못한다. 지난해 말, 육군참모총장에 자신의 모교인 포항 동지상고 출신을 임명하는 등 3군 참모총장에 모두 영남 출신을 임명한 뒤에는 “가장 공정한 인사”라고 했다. 대통령의 말이 이 모양이니, 그 아랫사람들도 제멋대로다. 전세대란의 기미가 역력한데도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은 “매년 이사철에 나타나는 수준” “심각한 수준 아니다”라며 헛발질을 했다.

이러니 신뢰가 붕괴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지금 우리 사회는 총체적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허수와 거품이 잔뜩 들어 있는 지지율에 취해 있는 듯하다. 그게 독약인 줄도 모르고.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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