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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곽병찬 칼럼] 존재의 무덤, 별일 없이 산다

등록 2011-01-25 20:41수정 2011-01-26 11:25

곽병찬 편집인
곽병찬 편집인
1914~1918년에 걸친 1차 세계대전의 공식 사망자 수는 1500만여명이었다. 전쟁 막바지 극성하기 시작해 1919년 잦아든 스페인독감으로 말미암은 인명피해는 최소 2000만명으로 추정된다. 서서히 죽게 하는 탓에 많게는 5000만여명에 이르렀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바이러스가 인류를 어떻게 끝장낼지 논의할 때마다 스페인독감이 거론되는 이유다.

스페인독감이 창궐한 것은 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 탓이 컸다. 스위스 국경에서 영국해협까지 1000여㎞에 걸쳐 조성된 서부전선의 참호는 뻘밭이나 다름없었다. 장병들은 피범벅의 진창 속에서 몇 달씩 지내야 했다. 전우의 떨어져나간 사지는 곳곳에 널브러져 부패했고, 그들의 발 역시 족창으로 썩어나갔다. 살판난 쥐들은 얼마나 영양상태가 좋았는지 그 크기가 강아지만했다고 한다. 지독한 공포와 스트레스, 최악의 영양상태와 부패한 환경은 독감 바이러스의 치명성을 높여, 이들은 총탄만큼이나 바이러스에 의해 죽어갔다.

그런 참호와 다를 바 없는 게 오늘날 공장식 축사다. 어미돼지는 출산을 위한 20일을 제외하고는, 1.5㎡의 쇠울타리(스톨) 안에서 고기가 될 때까지 감금돼 있다. 소라고 다를 게 없다. 닭과 오리는 아예 알과 고기를 생산하는 거치식 기계다. 구제역 발생 60여일, 공장식 축사는 고기공장이 아니라 홀로코스트의 기계실이 되었고, 바이러스 확산을 막으려던 참호는 거대한 생매장터가 되어 버렸다.

두들겨맞을 소린지 모르겠지만, 1차대전 때 참호 속에서 무의미하게 죽어간 장병들이 지금의 저 생매장당하는 소·돼지와 무엇이 다를까. 독일의 화가 오토 딕스는 연작 <전쟁>에서 참호전의 참상을 고발했다. 널려 있는 인간의 사지와 흙더미에 거꾸로 박힌 시체, 피범벅의 진흙탕 등. 하필이면 왜 저렇게 끔찍한가라는 물음에 화가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바로 저랬다. 나는 봤다.” 지금 우리도 그 모습을 본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수십일 동안을 보고 있다!

그러나 별일 없다. 설을 앞두고 백화점의 쇠고기 정육세트는 물량이 모자랄 정도이고, 택배 차량은 쉴 새 없이 골목을 누빈다. 눈가에 선망의 그늘이 어린 이들은 재래시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목로 위엔 머릿고기부터 오소리감투, 간, 허파, 곱창 그리고 족발에 이르기까지 가지가지 쌓여 있고, 걸상에 궁둥이 비집고 앉은 이들은 술 한잔에 돼지 얼굴처럼 평안하다. 누굴 탓할까. 오늘도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주고 떠난 이들에게 감사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잊는 것만은 안 된다. 저 생매장당하는 그들의 무참한 최후를,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탐욕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꼭 기억해야 한다.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이렇게 맺는다. 어느 맑은 날, 파울 보이머의 눈앞에 나비 한 마리 나타나, 앙상한 나뭇가지에 앉는다. 얼마 만에 느끼는 평화인가. 저도 모르게 일어나 나비에게 손을 뻗는 순간 저격병의 총알은 그의 가슴을 관통한다. 어느 누구의 죽음도 고통도 기억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전선사령부는 그날 이런 전문을 보낸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살아있는 것들치고 평화를 염원하지 않는 게 어디 있을까. 정육세트 앞에서도 황소의 굵은 눈물을 기억하고, 순댓국 한 그릇 말아 먹으면서도 돼지의 비명을 기억해야 한다. 이 비극을 끝내는 길은 오직 이것뿐이다. 오로지 인간의 장삿속 때문에 수많은 생명 생매장하고도, 저희만 무사하면 ‘이상 무!’ 소리치는 짓은 하지 말자.

파주의 아기돼지 순결이네 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동물보호 시민단체가 대필한 순결이의 편지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저의 후각은 개처럼 뛰어나고, 청각도 사람보다 우수하답니다. 저도 사람처럼 꿈을 꾸며, 머리가 좋아서 어른들이나 언니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뭐든 금방 배워요.” 돼지의 꿈, 더 순수했으면 했지 사람과 다를 게 없다.


편집인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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