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욱의 서양사람(史覽)
<스모크>라는 영화가 있다. 폴 오스터의 단편소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소재로 1995년에 개봉된 이 영화는 브루클린에 있는 한 담배 가게 단골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베를린 영화제의 은곰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이 영화에서 하비 카이텔이 연기한 담배 가게 주인은 담배 때문에 사라져버린 한 저작에 대해 말한다.
작가는 러시아의 문학비평가이자 언어철학자 미하일 바흐친이다. 오늘날 인문사회과학의 많은 분야에서 ‘대화적 상상력’, ‘크로노토프’, ‘폴리포니’, ‘카니발레스크’ 등등 그가 고안한 개념적 도구를 사용하여 연구의 틀을 정하는 것을 보면 그는 창의력이 풍부한 인물이었음이 확실하다.
스탈린 치하 예술가와 지식인들에 대한 숙청이 기승을 부리던 당시 그는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았으나, 악화된 건강 때문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소청이 받아들여져 카자흐스탄에서 6년을 보냈다. 이 기간에 그는 18세기 독일의 ‘성장소설’에 관한 저작을 완성했다. 출판사에 보낸 원고가 받아들여져 출판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독일군 침공의 혼란 속에 원고가 분실되었다.
애연가였던 바흐친은 독일군 침공의 암울하던 시절 담배를 말아 피우기 위해 자신이 갖고 있던 원고를 사용했다. 한 저작이 직유법으로 ‘연기처럼 사라진’ 것도 은유법으로 ‘연기가 된’ 것도 아니라, 직설법으로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것일지라도 이미 완결된 생각에 대해 보이는 바흐친의 태도를 드러낸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그 원고는 살아남았다. 그 상황을 안타까워하던 주변인들의 끈덕진 설득으로 바흐친은 쥐떼가 득실거리는 나무궤짝 속에서 미출간의 원고를 찾아냈던 것이다.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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