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논설위원실장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크고 작은 설화의 주인공이었다. “마사지는 못생긴 여자한테 받아야 서비스가 좋다”고 한 ‘마사지 발언’이 대표적이지만 그것 말고도 많다. 박근혜 후보에게는 “애를 낳아봐야 보육을 얘기할 자격이 있다”고 했고,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1970~80년대 빈둥빈둥 놀면서 혜택을 입은 사람들인데,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본다”고 매도했다. 또 금속노조와 무관한 서울시 오케스트라를 두고는 “오케스트라 단원이 금속노조에 가입했는데, 바이올린 줄이 금속이라 그랬나 보다”라고 했다.
설화는 단순한 말실수와 구별된다. 그 사람의 평소 인식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결국 행동과 정책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흔하다. 최근 이 대통령의 ‘설화성 발언’이 잇따르는 배경에도 그의 적극적인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이들 발언은 4대강 사업, 복지, 인사, 대북정책 등 국민들로부터 집중 비판받는 핵심 정책과 연관돼 있다.
“4대강 사업이 되면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산 개조의 꿈이 이뤄지는 것”(27일)이라는 발언은 도산의 정신을 왜곡해 사업 반대론을 공격하는 대국민 힐난이다. “우리가 복지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수준에 들어가고 있다”(22일)는 발언도 성격이 비슷하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미 복지국가에 살고 있는데도 만족하지 못하는 국민은 멍청이거나 거짓말쟁이임이 분명하다. 육군참모총장에 자신의 포항 동지상고 후배를 임명하는 등 3군 참모총장을 모두 영남 출신으로 채운 군 수뇌부 인사를 놓고 “가장 공정하게 했다”(16일)고 한 것이나, “통일이 가까워지고 있다”(9일)는 발언 역시 국민을 우습게 여기지 않으면 나올 수가 없다.
어떤 현상을 설명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려는데 개념 정리나 논리 전개가 잘 되지 않을 경우 효과적인 대처법이 있다. 우선 핵심 개념을 꼭 정의하려고 애쓰지 않고 기본 개념으로 간주해 논의를 확장하는 것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효용’이 그런 예다. 또 생태학에서 언급되는 ‘가이아’처럼 기존 개념들을 초월하는 별도 개념을 만들어 더 큰 틀을 짤 수도 있다.
이런 공인된 방식 외에 다른 방법도 있다. 권력과 권위를 동원해 기존 개념 틀을 강제로 바꿔버리는 것이다. 합리적 논의 대신 힘의 논리에 기대는 폭력적 형태다. 이 대통령의 발언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조리있게 설득하려 하는 대신 기존 논의구조 자체를 전면적으로 뒤집는다. 대통령의 권력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런 ‘말의 폭력’에 굴복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다수는 부정적인 생각이 더 강해지거나 아예 소통할 수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포기할 것이다. 이런 현상들이 지금 다 나타나고 있다.
이 대통령의 최근 행태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하나는 임기말 증후군(레임덕)이다. 실제로 한나라당의 상당수 의원은 대통령과 거리를 두려 하고 있으며, 청와대를 떠나고 싶어하는 관리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대통령으로선 강한 태도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할 법한 상황이다. 대통령직 수행에 자신이 붙은 이 대통령이 본래 생각과 성향을 거리낌없이 노출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많은 국민은 4대강 사업과 복지·인사·대북정책 등을 현 정권의 큰 취약점으로 꼽지만, 이 대통령은 정반대 모습을 보인다. 그 거리가 멀다 보니 갈수록 무리한 말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권력자가 빠지기 쉬운 오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예로부터 좋은 정치에는 올바른 말이 필수였다. ‘말씀’이란 뜻의 <논어>가 수천년의 생명력을 유지했듯이 우리 역사는 말을 중시했다. 서양에서도 소크라테스와 제자들이 나눈 말들을 모은 플라톤의 ‘대화편’은 지금도 생명력을 유지한다. 말을 혼란시키고 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대통령이 할 일이 아니다. 더 우려되는 점은 이런 말의 타락이 소통구조와 정책의 타락을 더 심화시킬 거라는 사실이다.
김지석 논설위원실장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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