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이름은 크리스티나 벨조이오소 공주였다. 이탈리아 망명 귀족인 그녀는 1830년대 파리에 살롱을 열었다. 그의 살롱에는 발자크, 하이네, 뮈세, 리스트, 라파예트 같은 저명인사들이 들락거렸다. 병약하여 창백했지만 자유로운 정신의 그에게 매혹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매혹을 넘어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는 낭만주의 시대 새로운 여주인공의 모델이었다. 하이네와 뮈세는 그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라파예트는 일흔넷의 나이에도 그에 대한 사랑에 소년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곤 했다.
아름다운 만큼 열정적이었다. 입헌군주제로 통일된 조국 이탈리아를 보기 위해, 여성과 소외계층의 교육과 언론의 자유를 실현시키기 위해 열정적이었다. 자신과 같은 망명객들을 돕는 일에도 열정적이었다. 열정적인 만큼 지적이었다. 이탈리아 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의 <새로운 학문>을 프랑스어로 번역했고, 가톨릭 교리에 대한 4권짜리 책도 썼다. 신문도 펴냈다. 미국의 저명한 일간지에 그가 쓴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만년에는 나폴리, 로마에서 밀라노까지 자원봉사자들을 이끌고 전장에서 간호에 나섰다. 터키 자객의 칼에 찔릴 위기도 겪었다. 1871년 예순셋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그는 통일 이탈리아의 탄생에 도움이 된 자랑스러운 시민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기억하지 못한다. 동시대 여성으로 뭇 남성의 연인이었던 시인 조르주 상드를 기억할지언정 크리스티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애초에 알지 못한다. 열정적이었지만 그 대상이 남성이 아니었기에, 여자처럼 시를 쓰지 않고 남자처럼 철학과 역사책을 썼기에 숭배하던 남성들이 적이 되었던 것이다.
잊혀 슬픈 많은 공주들을 위하여.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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