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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권태선 칼럼] 한국의 보수, 겨우 이 정도인가

등록 2010-11-21 21:31

권태선 논설위원
권태선 논설위원
개인의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고 그 수준을 향상시켜 민주적 기본질서 확립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설립된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출범 9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습니다. 세 상임위원 가운데 두 분이 현병철 위원장의 독단적 운영에 항의해 동반사퇴한 데 이어 비상임위원과 상당수 전문·자문위원들마저 현 위원장의 사임을 촉구하며 사퇴서를 던졌습니다. 그 결과 지난 8년간 국제적 모범으로 칭송받았던 인권위는 이제 아시아인권위원회가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에 모든 수단을 동원한 조처를 요구할 정도로 국제적인 골칫거리로 전락했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책임을 지는 사람도, 문제를 풀 방법을 강구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재임 1년 반도 채 안 돼 인권위를 만신창이로 만든 현 위원장은 오히려 큰소리를 칩니다. ‘최근 논란과 관련한 국가인권위원장 입장’이란 그의 해명에서 반성은 흔적도 찾을 수 없습니다. 자화자찬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호도하는 것도 불사합니다.

많은 왜곡 사례 가운데 하나만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연평균 5200건이던 진정사건이 자신의 재임기간에 8900건으로 늘어난 것을 치적으로 내세웁니다. 또 지난 9년 동안 인권위에서 내려진 표현의 자유에 대한 18건의 결정 가운데 7건이 자신의 재임기간에 이뤄진 점 역시 치적으로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 인권침해가 크게 늘어났다는 방증일 뿐입니다. 올 5월 우리나라를 방문해 인권상황을 조사한 프랑크 라 뤼 유엔 의사·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이 지난 2년 사이 벌어진 인권 퇴행을 확인하고 “한국이 70년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이런 인권 후퇴 속에서 이뤄진 표현의 자유에 대한 결정조차 그의 치적은 아닙니다. 그가 또다른 치적으로 내세운 정보통신 심의제도와 노조설립 신고제도 개선 권고나 양천서 고문사건 조사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적 파장을 우려해 결정이나 조사를 막고, 7~8개월씩 개선 권고안 상정을 늦춘 그가 이를 치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낯뜨거운 일입니다.

국민을 두려워하고 국가의 위신을 중시하는 정권이라면 이런 그를 비호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 정권은 그에 대한 자질시비와 퇴진요구에 귀를 닫았습니다. 오히려 청와대는 또다른 인권 문외한인 극우인사를 후임 상임위원으로 임명하는 폭거를 저질렀습니다. 한나라당도 뉴라이트 인사를 지명할 뜻을 밝혀 국민적 분노를 자극했습니다. 보수세력 내에 인권위원을 할 만한 합리적인 인사들이 없다곤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정권이 그토록 치우친 인사들로만 인권위를 채우려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인권위를 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감시와 국민의 기본권 신장이라는 본연의 의무엔 눈감고, 북한 인권 등 주변적 문제나 천착하는 조직으로 바꾸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정권의 이런 태도는 보수세력이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기도 합니다. 표현의 자유 등 자유권적 기본권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입니다. 인권이 진보의 전유물일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이 땅의 보수세력은 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에 눈감았습니다. 우익세력들이 ‘보수’를 참칭하면서 위원장의 자질부족에서 빚어진 문제를 진보 대 보수의 이념대결로 왜곡하는 속임수를 써도 못 본 체했습니다. 이러니 한국의 보수세력 대부분은 자유주의자도 못 된다는 비판을 받는 것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이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비판한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란 책의 돌풍이 심상치 않습니다. 이명박 정권 치하에서 사라진 인권과 정의 그리고 연대의 가치에 대한 국민의 갈증의 깊이를 보여주는 이런 현상은 국민을 무시한 채 마이웨이를 외치는 이 정권에 제동을 걸지 못하는 보수세력에 대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보수를 위한 진정한 보수의 궐기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권태선 논설위원 kwont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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