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제왕들은 나폴레옹을 두려워했다. 나폴레옹 군대의 용맹과 전략 때문만이 아니었다. 국왕을 단두대로 보낸 프랑스 혁명의 이념이 나폴레옹의 군대를 따라 자신의 국가로 번질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가 확산되면 왕정 유지가 어려워질 수 있고, 민족주의 정신이 만연하면 약소국들마다 독립을 원해 강력한 제국의 위상이 흔들릴 수 있었다.
따라서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패배시킨 뒤 4대국의 지도자들이 했던 일은 유럽의 정치적 상황을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되돌려놓는 것이었다. 그 일을 수행한 빈 회의의 기조는 단연 복고주의였다. 1814년 9월부터 1815년 6월까지 열린 그 회의는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가 주재했다. 200이 넘는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와 왕실뿐 아니라 도시와 종교단체와 이익단체에서도 대표단을 파견하여 회의는 호화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빈 회의의 가장 큰 특징은 회의가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대표단이 함께 만나 회의가 진행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폴레옹 패배 이후 유럽의 세력 균형을 새롭게 확립한다는 목적을 표방했지만, 중요한 사항은 이면에서 음모와 비밀회의를 통해 결정되었다. 자유와 평등의 원리를 말살하려는 음모의 주인공이 메테르니히였고, 각국의 대표는 자국의 낡은 기득권을 챙기기에 바빴다. 시인 하이네는 메테르니히를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된 나폴레옹의 간수였던) ‘허드슨 로’라고 조롱하였다. 공식적인 회의보다는 화려한 연회, 무도회, 음악회, 사냥 모임이 주류를 이뤘다. 그리하여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조금도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곳에서 회의는 현재진행형으로 춤춘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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