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편집인
병원을 빠져나오자 창경궁 낙엽밟기 포스터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발길은 차도를 건너 창경궁 매표소로 향했다. ‘이제 그는 제 발로 저 문을 걸어 나올 수 없겠구나….’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이 생각이 발길을 그리로 이끈 장본인이었다.
창경궁 춘당지로 향하는 숲길은 고즈넉했다. 낙엽이 예상보다 많이 쌓이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바람 혹은 발길에 그저 바스락거릴 뿐, 마음까지 소슬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 덕에 숲은 여전히 넉넉했고, 춘당지 돌아드는 짧은 길은 깊고도 아득했으며, 11월 안개 자욱한 날씨에도 환하게 불타고 있었다. 갖가지 이름의 단풍나무, 복자기의 선홍색은 물론이고, 느티·회화·떡갈·서어·층층나무 등 여름 한철 근엄했던 키 큰 나무들조차 볼 붉은 아이처럼 때깔이 선연했다.
숲속은 불속 같았지만, 냉정하리만치 깔끔했다. 원색의 바다는 현기증 날 정도였지만, 나무·가지·잎사귀 어느 것 하나 뒤섞임 없이 정갈했다. 한겨울의 칼추위, 한여름의 무더위와 폭풍우마저 뜨겁게 사랑하며 살았던 까닭일까. 그들의 세상 떠나는 모습은 그렇게 찬란했다. 해거름에 쫓겨 잠깐 머무는 저녁놀 빛, 문둥이의 저 붉은 울음(한하운) 따위가 떠올랐다. 마음속 깊은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선홍의 기억들이 빚어내는 그런 빛깔이었다.
“안타까운 표정 짓지 마세요. 입을 크게 벌리고 웃게 만드세요. 그래야 빨리 회복된대요.” 그의 병실에 처음 찾아갔을 때, 그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애써 지은 밝은 웃음 뒤의 짙은 그늘을 숨기진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질 못했다. 여남은 호스로 생명을 지탱하는 그 앞에서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지난 주말 갔을 때 다행히 그 부인은 없었다. 그사이 마른 장작처럼 말라버린 종아리를 만지다가, 주뼛주뼛 말을 걸었다. “보고 싶은 사람 없냐? 네가 팬 친구나 아님 너를 곤란케 한 친구 말야. 아니면 마누라 말고 사랑하는 사람은 없니? 있으면 말해봐, 이럴 때 핑계 잡고 봐야지, 언제 보냐. 아마 마누라도 봐줄걸.” 성가시게 주절댔다. 미동도 않던 그가 문득 몸을 30도쯤 세우더니 간병하던 고모에게 무언가 말을 했다. “아버지 있잖아, 아버지.”
곧 눕긴 했지만, 그의 얼굴은 환하게 밝았다. 조카의 모처럼 웃는 모습에 감동한 고모는 프라이버시고 뭐고 가리지 않고 오빠의 숨겨진 뒷얘기를 풀어놨다. “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중학교 때 그 사람이 아마 아버지 묘소를 찾아갔다지?”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친구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이뤄지지 못한 사랑 탓일까, 아니면 저의 따듯한 사랑의 기억 탓일까.
그 평온한 미소를 잊지 못해 엊그제 처와 함께 다시 춘당지를 찾았다. 여전히 숲은 깔끔하게 불타고 있었다. 단풍 앞에서 ‘참으로 선하다’는 생각이 든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일하고 가까운 이웃을 챙겼던 이들의 미소처럼.
이튿날 저녁 단풍잎 하나 내게 떨어졌다. 그렇게 그는 떠났다. 권세, 명예, 부 어느 것 하나 기억할 게 없는 사람. 몸은 마른 잎사귀처럼 금세 바스러지겠지만 그 선한 빛깔만큼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사람이었다. 공연히 심통이 사나워진 것은 그제야 깨달은 사실 하나 때문이었다. 무심한 나에게 그는 항상 아랫목 이불 속처럼 따듯했다! 길가의 돌멩이를 걷어찼다. 안도현 시인의 시가 채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너에게 묻는다’) 저렇게 선한 빛깔로 너는 떠날 수 있겠는가. 회백색 재로 남을 때까지 아낌없이 태워, 누군가 한 사람에게라도 그 따듯함의 기억 남길 수 있을까. 제 묘혈 파면서도 기고만장한 권력의 황혼, 언저리에서 칼춤 추는 부나비들, 떨어지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철없는 잎사귀. 그와 다르다고 너는 말할 수 있겠는가.
곽병찬 편집인 chankb@hani.co.kr
곽병찬 편집인 chankb@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