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편집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외교력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마다, 한반도가 당한 외침이 3000번 이상이라고 강조했다. 숫자에 워낙 꼼꼼했던 터라 함부로 무시할 순 없지만, 아무리 꼼꼼한 학자라도 왜구의 노략질 따위를 포함한 침탈의 숫자를 헤아린 사람은 없었으니 곧이곧대로 믿기도 어렵다. 그만큼 많이 당했구나라고만 이해할 뿐이다.
한반도는 대륙과 대양을 연결하는 지정학적 특수성 탓에 때론 문명이 소통하고 융합하는가 하면, 때론 팽창주의자들의 침략의 교두보로 떨어지곤 했다. 나아가 패권전쟁의 전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척족, 파벌의 권력다툼 속에서 국토를 외세의 전장으로 내준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대표적이다.
정전 57년째라지만 한반도의 불안정성은 변함없다. 오히려 지금 분쟁의 위험성은 더 커지고 있다. 안으로는 남북의 대치가 더 깊어지고, 밖으로는 열강의 각축이 한국전쟁 이래 가장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우선 동아시아 차원에서 미국과 중국이 이 지역 패권을 놓고 벌이는 각축은 환율, 무역, 외교를 넘어서 군사적 차원으로 확장되고 있다. 미국은 남중국해에서 베트남·라오스·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들과 연합해 중국의 팽창을 막기 위한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동중국해에선 댜오위다오 열도를 둘러싼 영토분쟁을 기회로, 대중국 봉쇄에 일본을 앞세운다. 동북아에선 천안함 침몰사고를 계기로 이미 중국과 완고한 대치전선을 구축했다. 일본 열도에서 시작해 오키나와, 필리핀을 거쳐 베트남까지 중국에 대한 봉쇄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중국은 한편으론 군사력, 다른 한편으론 경제력을 앞세워 한치의 물러섬도 없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 특히 위협적인 것은 중-일 분쟁이다. 현재 일본 쪽에선 전쟁 금지를 규정한 평화헌법 개정 논의가 비등하고, 중국에선 일본 응징론이 여전히 힘을 얻고 있다. 두 나라의 감정은 116년 전 청일전쟁 때를 연상시킨다. 그때 한반도는 두 나라가 패권을 쟁투하는 전장이 됐다. 지금도 어떤 유탄을 맞을지 모를 상황이다.
한반도 안 상황도 심상치 않다. 어제 서울 한복판에선 F-15K, KF-16 등 주력 전투기 20여대가 고도 500m의 초저공비행으로 시민들을 질겁하게 했다. 서울 수복 60돌 기념 축하비행이라고는 하지만, 청와대 앞 경복궁 하늘에서의 저공비행은 이례적이다. 공군 창군 50돌, 건국 60돌 기념 때도 있었다지만 그건 외곽에서였다. 바로 그 시각 서해 태안 앞바다에선 한-미 연합 대잠수함 훈련이, 어뢰발사 폭뢰 투하 등 실전 형태로 진행됐다. 한국형 구축함과 미국의 이지스함 등 7척의 전함이 참여하고, 특히 기껏해야 상어급(370t 안팎) 잠수함이 작전하는 해역에서 핵추진잠수함(로스앤젤레스급, 7800t)까지 동원됐다. 북한은 물론 중국도 긴장할 일이다.
이에 맞서 북한은 예의 그 불바다 응징을 공언하는 한편, 10월10일 노동당 창당 기념일에 맞춰 예년보다 2배 규모의 대규모 군사력 퍼레이드를 준비한다. 여기에 어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들 김정은이 대장 칭호를 받는 등 후계자로서 전면에 등장했다. 본격적인 권력이동기에 접어든 것이다. 이에 따라 북 체제 내부의 동요나 권력갈등이 예상되며, 이는 남북의 긴장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삼계화택(三界火宅), 지금 한반도가 꼭 그 상황이다. 나와 주변이 모두 불타고 있는 상황이라면 먼저 내게 붙은 불부터 꺼야 한다. 남북의 불신과 대치를 극복하는 게 우선인 것이다. 설사 중국과 미·일의 갈등이 임계점으로 고조된다 해도 남북이 자주적 위기관리 능력을 키운다면 한반도가 외세의 전장으로 변하는 일은 피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균형잡힌 4강 외교를 펼친다면, 김 전 대통령 말대로 네 총각(4강)이 프러포즈하는 규수로 폼 잡을 수 있을지 어찌 알겠는가.
곽병찬 편집인 chankb@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