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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곽병찬칼럼] 경술년 국치와 경인년 치욕

등록 2010-08-24 19:42

곽병찬 편집인
곽병찬 편집인
100년 전 일제에 의해 병합조약이 체결된 8월22일부터 그것이 공표된 29일까지 한반도엔 길고 불온한 침묵이 흘렀다. 식민체제라는 미증유의 지진해일은 저 침묵의 바다 밑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승리와 영광만 기억하고 패배와 치욕은 잊으려는 기억의 통속성 때문이었을까. 역사는 지금도 비굴과 치욕으로 가득했던 그때를 잘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고작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이 남산 중턱 총독관저에서 “고바야가와, 가토, 고니시(임진란 왜장들)가 지금 살아있다면 저 달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라고 거들먹거렸다는 정도의 야사만 남아 있다.

국치 100년을 맞은 올해마저 그러하니 다른 해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그런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면, 영광보다는 치욕을, 승리보다는 패배를 기억해야 마땅할 터이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신하로 하여금 “왕은 회계산의 치욕을 잊으셨는가”라고 묻도록 엄명했던 춘추전국시대 월나라 구천의 고사는 그래서 기억할 만하다. 영광의 기억은 자부심을 넘어 자만으로 흐르지만, 치욕의 기억은 신중함과 함께 삶에 견결함을 더해준다.

엊그제 <한국방송>은 망국의 황제 고종을 재평가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민비를 국모로 추앙하려는 움직임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빈곤한 역사인식은 역사적 진실이 설 자리마저 위협한다. 망국의 1차 책임자는 다름 아닌 고종과 민비 그리고 민씨 척족이었음을 누가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고종이 노련한 외교로 약소국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지만, 그가 지키려 했던 건 국권이 아니라 왕권이었다. 그것도 국가의 이권을 미끼로 강대국의 환심을 사려 했던 게 고작이었다. 그에게 백성은 여전히 복종해야 할 신민이고, 권리를 주장하는 백성은 역도였다. 백성을 버린 왕실은 고립무원이었고, 상호 견제를 기대했던 외세가 서로 결탁하면서 왕권과 국권은 순식간에 붕괴했다.

그런 왕권은 민씨 척족에게 그저 권력과 이권을 지켜주는 보호막이었다. 그들은 왕권에 의지해 한때 지방관의 90%를 팔아먹었다. 이는 전국에서 가렴주구가 창궐하도록 했다. 척족의 대부 민겸호 선혜청 당상은 6개월 만에 준 구식 군대의 월급으로 불어터진 쌀에 모래와 겨를 섞어 줬다가 임오군란을 자초했다. 이들은 자신의 이해를 지키기 위해선 외국군을 끌어들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일제에 의한 병탄이었다.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청군을 불러들여 군변의 연루자를 척살토록 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해 왕권이 위태로워지자, 다수 신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군을 다시 불러들였다. 이는 일본군의 자동개입을 초래해 한반도는 외국군의 각축장 혹은 전장이 되어버렸다. 이후에도 러시아, 미국 등에 의지해 무너져가는 왕권을 지키고 자신의 기득권만 지키려 했을 뿐이다.

경술국치 100년 후 지금 한반도 주변은 다시 열강이 대치하는 전선이 되었다. 천안함 사태 이후 남쪽은 미군을 불러들였고, 이는 중국을 자극해 서해는 무력시위의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북쪽의 해안포탄이 북방한계선 남쪽으로 날아들었고, 남쪽은 즉각 대응을 공언하고 있다. 미국은 군사적 지원 대신, 남쪽을 중국 봉쇄의 전진기지로 이용하고, 병참 지원을 요구하는가 하면, 이란 제재를 압박하고, 불평등 자유무역협정을 강요한다. 다시 한국은 역사적 치욕에 직면해 있다.

지금이야 척족이 활개칠 수 없지만, ‘형님’을 정점으로 한 비선조직의 국정농단 의혹은 끊이지 않는다. 민간인 및 정치인 사찰과 관련해 집중포화를 받았던 그 실무책임자는 대통령의 비호 아래 승승장구한다. 구리디구리지만 대통령의 측근이란 이유로 내정된 고위공직 후보자들의 면면은 구한말 척족과 다를 게 없다. 대통령은 경술의 치욕을 상기하고,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당신이 지키려는 게 국권인가 정권인가, 국익인가 파벌 이익인가, 국가 안위인가 측근 안위인가.

곽병찬 편집인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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