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편집인
어제는 한국전쟁 휴전기념일, 세계 전사상 유례없이 처참했던 골육상잔이 중단된 날이었다. 마땅히 그 참상을 기억하고 전쟁 없는 한반도를 다짐해야 했다. 그러나 참상의 기억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온통 사상 최대의 전쟁연습과 최첨단 살상무기에 관한 이야기로 도배돼 있었다. 하루 종일 입맛이 썼다.
그날 동해상에선 세계 최강의 항공모함과 이지스 순양함, 구축함 등 최신예 전함 20여척이 전투 대형으로 기동했다. 한반도 상공에선 출격 후 40분이면 북의 심장을 타격할 수 있다는 F-22 랩터 등 200여대의 전투기가 선회했고, 해저엔 공격형 핵잠수함 투산이 목표물을 찾아 잠행하는 등 대규모 훈련이 벌어졌다. 동원된 해공군 전력만으로는 한국전쟁 후 최대규모였다.
한반도를 병탄했던 일본의 자위대 간부들도 훈련을 참관했다. 한반도 유사시를 대비해 자위대 재배치, 무력 증강을 추진하는 일본이 언제든 개입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조처였다. 20세기 벽두 미국과 일본은 필리핀과 한반도에 대한 서로의 배타적 지배권을 인정했었다.
중국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한-미 연합훈련에 대해 거듭 강력한 대응을 천명했던 중국은 자국의 안전과 이익활동에 영향을 주는 일에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경고했다. 당 기관지들은 망동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한국을 규탄했다. 북한 역시 필요하면 언제든 핵 억제력에 기초한 보복 성전을 개시하겠다고 공언한다. 실제 북한은 3차 핵실험을 실시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관측됐다. 러시아는 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해 나름의 과학적 반론을 제기하며 연합훈련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이들을 측면 지원했다. 한반도엔 한-미와 북-중이 날카롭게 대치하고, 일본과 러시아가 후방에서 대기하는 전선이 형성돼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된 원인은 천안함 침몰 사건에 대한 정부의 미숙한 대처였다. 원인 규명 과정은 졸속이었고, 때문에 그 결과는 허점투성이였다. 이를 근거로 국제적인 대북 제재를 추진했으니, 국제사회가 이해관계에 따라 나뉘고 또 서로 견제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정부는 미국의 전면적 지원에만 의존했던 탓에 상황 관리의 주도권을 미국에 넘기다시피 했다. 설사 정부가 확신하듯이 북한의 소행이 맞다 해도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넘겨선 안 되는 일이었다.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 핵잠수함 투산, 전투기 F-22 랩터가 장악한 한반도 남쪽 안보상황이 상징하듯이, 미군은 한반도 운명의 열쇠를 쥔 것처럼 보인다. 한국 해공군의 주력이 미 7함대의 부속 전력으로 편제된 것은 한국의 처지를 상징한다.
자국의 문제를 외국군에 의존해 해결하려 할 때 어떤 결과에 직면하는지 잘 보여주는 게 몰락기 조선왕조의 행태였다. 무능한 왕조는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때 청군에 의지해 다 떨어진 왕권이나마 유지했던 것에 감읍하며, 갑오농민전쟁 때에도 청에 농민군 진압을 요청했다. 그러나 청군의 한반도 진주를 좌시할 일본군이 아니었다. 청군이 남양만에 상륙하자 일본군도 인천으로 진주했다. 결국 한반도의 독점적 지배를 집요하게 추구해온 일본군이 먼저 청의 군함을 침몰시키면서 청일전쟁은 터졌고, 조선의 민중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처참한 전쟁 피해를 당해야 했다. 10년 뒤에도 조정은 러시아군을 끌어들이려다 러일전쟁의 빌미가 됐다. 역사엔 가정이 필요없다. 그러나 갑오농민전쟁 때 조정이 자결원칙에 따라 농민군과 협상하고 폐정 개혁을 받아들였다면 한반도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다.
구한말이나 해방정국의 격동기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에 속지 말라. 일본(놈) 일어선다’는 내용의 노래가 유행했다. 되놈을 포함시켜도 된다. 처참하게 당했던 역사적 경험이 빚어낸 지혜였다. 그러나 매번 이쪽저쪽에 의지하려다 민족적 참화를 겪곤 했다. 노랫말처럼 ‘조선사람, 조심하자’.
곽병찬 편집인 chankb@hani.co.kr
곽병찬 편집인 chankb@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