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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곽병찬칼럼] 독선의 덫과 멍게의 뇌

등록 2010-06-29 20:40

곽병찬 편집인
곽병찬 편집인
미국산 쇠고기 전면 개방, 한반도 대운하 혹은 4대강 사업, 세종시의 사실상 백지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연기, ‘엠비표’ 국책사업들이다. 4대강 사업을 제외하고는 모두 노무현 정책을 뒤집은 것이지만, 이보다 더 현저한 특징은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삶에 직결된 문제임에도, 국민이 정책 결정의 주체가 아니라 정책 집행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행정편의주의와 기밀주의가 관철되고 있다는 점 또한 두드러진다.

사정이 이러하니 결과가 신통할 리 없다. 쇠고기 협상만 해도 이 정부는 참여정부가 3년간 엎치락뒤치락해온 것을 단 8일 만에 끝냈다. 그러나 국민의 건강권, 검역주권을 포기한 결과, 집권 초부터 정권 차원의 위기를 자초했다. “맛 좋고 질 좋은 쇠고기를 국민이 먹게 됐다”던 이 대통령의 자화자찬은 그의 독선과 불통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어제 국회에서 폐기된 세종시 수정 정책도 다르지 않다. 그는 대통령선거 당시 십수차례나 원안 추진을 약속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자, 선거 때 무슨 약속은 못 하겠느냐며 원안 수정을 공언했다. 여당내 분란도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으니 그 결과는 뻔했다. 오기로 밀어붙인 결과 게도 구럭도 모두 잃었고, 일찌감치 레임덕의 반환점만 도는 꼴이 됐다.

일사불란을 강조하는 독선과 오기는 언제나 기밀주의와 짝을 이룬다. 기밀주의는 눈가림과 거짓을 동반한다. 엊그제 발표한 전작권 환수 연기 결정은 이런 공식이 그대로 적용된 경우였다. 한·미 두 나라 정상이 발표하기 전까지 청와대의 공식 해명이나 발표는 거의 모두 거짓말이었다.

지난 4월22일 <동아일보>와 <한국방송>은 6월 말 주요 20개국 정상회의 때 한·미 정상이 전작권 전환 연기 방침을 공식 발표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대한 청와대의 반응은 단호했다. 비밀협상의 주역으로 알려진 청와대 비서관은 “웃기는 소리 말라고 하라”고 조롱했다. 6월 초 <중앙일보>가 전작권 환수 연기 후속 일정까지 보도하자 그 비서관은 “오버해서 써놓고 나중에 아니면 말고 식이다”라고 매도했다. 청와대의 이런 태도는 김태영 국방장관이 1월 중순 연기 논의 가능성을 제기했을 때부터 계속됐다. 누군가 뒤에서 끊임없이 흘리고, 앞에선 거짓 해명을 입에 달고 살았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동관 홍보수석은 보도될 만큼 다 보도된 내용에 대해 엠바고를 요청하면서 “미국에서 철저한 보안을 당부했다”고 둘러댔다. 그러나 미국의 관심은 온통 자동차와 쇠고기 문제에 대한 한국 쪽의 양보였을 뿐이었다.

비싼 대가를 거듭 치렀음에도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기업가 출신의 한 여당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요즘 기업인들 만나면, 다음엔 기업인 출신 대통령은 절대로 뽑지 않겠다고 해요. 이번으로 족하다는 겁니다. 남의 말 절대 듣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만 하고….” 국가를 제가 소유한 기업쯤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고기처럼 헤엄쳐 다니는 멍게의 유충에겐 뇌가 있다.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충이 되어 바위에 붙어 고착생활을 하게 되면 뇌가 사라진다. 조건반사 기능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돌아다니긴 하지만 촉수에 걸리는 먹이만 먹고 사는 말미잘과 해파리도 마찬가지다. 뇌는 환경에 대한 정보를 분석하여 적절한 대책을 세우고 수행하기 위해 생기는 셈이다.

정치 행위의 핵심은 여론의 바다를 헤엄치며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대책을 세우는 데 있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정치적 두뇌는 진화한다. 독선은 멍게처럼 고착생활을 하며 조건반사에 따라 움직이는 것과 같다. 습관이나 고집에 따르는 만큼 분석과 판단의 기능이 필요없다. 정치적 무뇌 상태다. 그로 말미암은 비극은 우리 현대사에서 많았다. 다시 또 보고 싶지 않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그 전조가 뚜렷하다.


곽병찬 편집인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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