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편집인
“박근혜 대표께서는 우리 당의 주요한 지도자시고, 선거의 여왕이니, 박 대표께서 도와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이고, …협력해 주시기를 계속 원했었고, 그런 뜻을 계속 전하고 있다.” 김문수 경기지사 후보가 엊그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불과 4개월 전 세종시 수정에 반대하는 박 전 대표를 두고 “무슨 (정치적) 신뢰냐. 충청도 표를 얻기 위한, 득표를 위한 포퓰리즘이지”라고 깔아뭉갰던 그였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유시민 민주당·국민참여당 단일후보 등장 이후 선거판이 흔들리고 있다. 경기도는 물론이고 인천에선 반전의 조짐마저 보인다. 오세훈 후보를 뒤쫓는 한명숙 후보의 추격이 계속되고 있고, 인천에선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야당은 낙담이 기대감으로 변했고, 여당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돋보이는 건 냉담하던 유권자들의 관심이 살아나는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 후보는 박 전 대표에게 넙죽 엎드렸다. 그러나 변화의 진앙은 유 후보가 아니다. 사실 그는 김 후보가 잘라 말했듯이 ‘편한 상대’일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대구·경북, 서울 등을 저울질하다가 막판에 경기도로 옮겼다. 경기도 유권자로선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게다가 그는 가장 강력한 민주당 비판자였다. 그에게 민주당은 지역당일 뿐이었다. 때문에 민주당과의 결합 대신 신당 창당을 강행했다.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에겐 매우 불편한 존재다. 그에게 등을 돌릴 수 있다는 지적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국민참여당 당원은 열렬하지만 8000명에 불과하고, 민주당 당원은 30만명에 이른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유씨로의 후보 단일화는 선거판을 뒤흔든다. 이른바 ‘노빠’를 경원하고, 유 후보는 더더욱 기피하던 유권자들마저 변화의 흐름에 동참하고, 그 흐름을 주도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단일화의 중요한 착점은 민주당의 야권 헤게모니에 금이 갔다는 사실이다. 유 후보가 승리했다기보다 민주당이 패배했다. 이에 환호한 것은 여당이 아니라, 야당 성향의 비판적 유권자였다. 현 정권에 넌더리났지만, 무능하고 무기력할 뿐 아니라 조잡하기까지 한 민주당에 신물난 이들이다. 이들은 정권이 소수 기득권층을 대변하고, 대다수 국민을 무시하며, 인권과 문화 등 국가의 품격을 땅에 떨어뜨린다고 해서 반사적으로 야당을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권 능력, 헌신의 자세, 비전과 열정 따위가 없는 야당에도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그런 이들이 이번 사건에서 민주당 중심의 야권 체제 변화 가능성을 보고 희망을 회복한 것이다. 단일화 과정에선 침묵하던 여론이, 민주당 후보의 패배 이후 요동치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숨죽이던 이들은 비로소 수다스러울 정도로 선거를 말하기 시작했다. 유 후보의 지지율이 단번에 김진표 후보 지지자를 흡수하고도 5~6%포인트를 더 높인 것은 그 덕택일 것이다.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유권자의 냉정한 판단과 전망 그리고 행동이 판을 움직이는 진앙인 것이다. 그동안 민주당의 행태는 지리멸렬 자체였다. 정권의 독주와 독단을 견제하기는커녕 방관·방조만 했다. 천안함 참사만 보더라도, 정권의 의도와 처리 방향이 분명한데도, 여권의 일원이라도 되는 양 처신했다. 즉각 책임을 물었어야 할 국방장관 등이 조사에서 발표까지 통제하도록 했고, 고소·고발 등으로 정당한 분석과 문제제기를 억압하는 걸 지켜봤다. 지도부는 그저 지역기반을 둘러싼 골목대장 싸움에 열중했다. 감히 희망을 말할 입장에 있지 않았다. 유권자의 열정을 냉각시키고, 결집을 가로막은 건 바로 이런 민주당의 불임성이었다.
억울해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엄중한 교훈과 경고를 던진 이 작은 패배를 고마워해야 한다. 곽병찬 편집인 chankb@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