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선 논설위원
지난주 우리는 모처럼 행복했습니다. 밴쿠버 올림픽에서 예상치 못한 메달이 쏟아진 것도 그렇지만 메달리스트들의 상큼함이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했습니다. 모태범, 이상화, 이승훈 선수 모두 어찌나 밝고 당당하던지요.
김연아, 박태환, 신지애 선수에 이어 밴쿠버에서 새롭게 등장한 젊은 샛별들의 당당함을 보노라면 그동안 한국 사회의 발전과 성숙을 실감하게 됩니다. 선배 세대가 피땀 흘려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의 터전 위에서 자라난 새로운 세대가 자기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긍정을 바탕으로 유연하고 당당하게 세계와 어깨를 겨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 사회에 대한 긍정과 자신감의 표현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색깔론을 덧씌우며 비난하지만, 진현민 판사가, 학생들을 데리고 ‘남녘 통일애국열사 추모제’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기소됐던 전직 교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도 본질적으론 이들 젊은이들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자신감의 표현입니다.
그는 판결문에서 추모제는 강한 상징성 때문에 선뜻 수용하기 힘든 측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 전야제에 참석해 6·15 남북공동선언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구호를 외친 행위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우리 사회가 남북 대결 시대의 비극을 감싸안을 수 있을 정도로 성숙했으며 구호 몇마디에 흔들릴 만큼 허약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사실 북한이 우리 체제를 위협할 만한 힘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1990년대 초 처음 북한을 방문했다는 한 재미목사는 보름간 여러곳을 돌아본 뒤 북한은 이제 전쟁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남북의 경제력이 비슷했던 70년대와 달리 이미 90년대 초 북한의 수준은 남한과 비교가 안 됐다는 것이지요.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북한의 상황은 더 나빠져 국내총생산액은 남한의 38분의 1에 불과하고 식량조차 대외지원에 의지하는 처지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우리 사회에 비판적인 사람도 북한 체제를 동경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법의 해석도 현실에 바탕을 둬야 한다면, 이런 사정에 비춰볼 때 진 판사의 판결은 상식적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체제 대결에서 북한에 완승을 거뒀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이 판결을 비난합니다. 일부 언론은 전교조 창립 무렵 진 판사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며 그를 전교조 이념교육의 산물로 부각시키고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 등은 그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합니다. 이런 신경질적 주장을 듣다보면 이들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의심하게 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의 반응입니다. 그는 이번 판결에 대해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의 기본이 되는 정통성을 이렇게 무너뜨리고 훼손한다면 역사에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정 대표는 국가보안법의 서슬이 시퍼렀던 시절에 소떼를 몰고 방북한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아들입니다. 또 금강산관광 등 대북사업이 주업인 현대아산은 그의 형수가 회장으로 있습니다. 정 대표의 주장대로라면 민족의 공존과 평화통일에 헌신했던 정주영 전 회장 등은 역사에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들이 됩니다.
국가 지도자라면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 정도는 알아야 합니다. 그저 정략적 판단에 따라 아무 말이나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큰 지도자가 되려는 꿈은 포기하는 게 낫습니다. 모태범이나 이상화 같은 젊은이들이 주류가 되는 세상을 향해 낡은 과거의 잣대를 들이대다간 시대착오적 세력으로 내쳐지게 될 테니까요.
권태선 논설위원kwont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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