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선 논설위원
“일본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다만 희망이 없을 뿐이다.”
일본의 저명한 작가 무라카미 류는 방향타를 잃고 표류하는 일본을 이렇게 한탄했다지만, 지난해 역사적인 정권교체 이후 일본 사회에는 새로운 희망이 움트고 있는 듯합니다. 일본의 미래를 묻는 토론들이 활발히 전개되고 대안을 찾는 책들도 쏟아지고 있습니다.
현재 상태가 계속될 경우 경제규모가 2050년에는 세계 10위권으로 추락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는 등 위기의식이 높지만, 바로 이 위기야말로 국가의 틀을 바꿀 수 있는 기회라는 공감대 역시 넓어지고 있습니다. 저출산 고령화, 청년 실업, 비정규직 양산, 사회적 격차 확대 등 일본 사회를 옥죄고 있는 문제들을 풀기 위해 대안을 찾는 이들은 미국식 시장근본주의와 토건사업에 의지해온 기존 노선에서 혁명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읍니다. 집권 민주당이 내건 ‘콘크리트에서 사람으로’란 기치는 그런 변화의 새로운 지향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발전 경로를 밟아온 우리나라 역시 일본과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위기를 가져온 원인에 대한 분석과 대안에 대한 일본 사회의 논의를 살펴보는 일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90년대 경제위기에 대한 일본과 덴마크의 대응 차이에서 현재 위기의 원인을 찾는 우에노 지즈코 도쿄대 교수의 지적이 그렇습니다.
덴마크는 경제위기로 실업률이 치솟자 유연안전성이란 새로운 틀을 개발했습니다. 고용시장의 유연성은 최대한 보장하되 노동자들의 생활 안정은 국가가 책임지는 시스템입니다. 고용주는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지만, 해고된 노동자는 4년간 보장되는 실업보험으로 생활의 안정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직업훈련을 통해 쉽게 재취업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또 임금과 복지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없애 여성의 취업을 촉진했고, 그것은 다시 새로운 돌봄노동 일자리를 창출하는 선순환 구조를 낳았습니다. 그 덕에 실업률은 10%대에서 5% 아래로 떨어졌고, 여성 취업률도 80%대에 육박해 남성과 동등해졌습니다.(우리나라 여성 취업률은 50%를 조금 넘음) 유연한 노동시간과 돌봄노동의 사회화 덕에 80년대 1.4에 머물던 출산율도 1.94로 높아졌습니다. 우에노 교수는 이를 좋은 유연화라고 합니다.
일본 역시 같은 시기에 유연화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외치며 해고의 자유를 주곤, 해고자들을 위한 사회안전망 마련에는 소홀했습니다. 촘촘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려면 세수증대가 필요했지만, 정부는 오히려 소득세 누진율을 낮추고 법인세 인하를 계속했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은 확대됐고 비정규직에 포진된 여성들은 저임금 노동자군을 형성하게 됐습니다. 나쁜 유연화입니다. 그 결과 사회적 격차가 확대돼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다섯째로 빈곤율이 높은 나라로 전락했습니다. 삶의 불안정성이 증대되면서 저출산 문제 역시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일본은 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과 우애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중심에 두고, 연대의 정신을 회복하지 않으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겪어온 과정도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아직도 토건입국의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세종시에 대한 결정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를 옥죄고 있는 사회적·지역적 격차의 심각성도 제대로 인식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니 무라카미 류 식의 한탄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다만 희망이 없을 뿐이다.”
권태선 논설위원 kwont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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