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논설위원실장
핵 문제를 풀기 위한 북-미 협상은 곧 시작되지만 우리 정부는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다. 10여년 전 김영삼 정권 때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당시 정부는 북한을 비난만 하고 대북 협상에서 소외돼 있다가 거액의 경수로 비용 등을 떠안았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지난 18일 참여하겠다고 밝힌 ‘양자·다자 대화’가 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6자회담은 유지될 것이다. 무엇보다 미국이 강한 의지를 보인다. 우선 한국과 일본은 동맹국이자 돈줄이다. 프랭크 자누지 상원 외교위 전문위원은 최근 “미국인들은 (대북 협상 성공으로 발생할) 모든 비용을 부담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며 따라서 부담을 여럿이 나눠 가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더 중요한 건 중국과의 관계다. 미국은 중국의 충분한 협력을 얻지 못하면 핵 협상은 물론 아시아 정책 전체를 끌고 가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중국은 북-미 대화가 활발해질수록 자신의 대북 영향력도 줄어들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미국이 한반도 관련국들을 모두 묶어둘 좋은 틀이 바로 6자회담이다.
‘핵 없는 세계’를 지향하고 대화의 힘을 믿는 버락 오바마 정부에 대북 협상은 새로운 전략이 아니다. 정권 출범 전부터의 구상이 숙고·조정 기간을 거쳐 현실화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태도는 이런 현실과 너무 차이가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무시’다. 현실을 무시하고 북한을 무시하고 미국·중국의 움직임까지 무시한다. 구태의연한 대결의식에 사로잡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기합리화에 치중한다. 최근 며칠 사이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과 현인택 통일부 장관, 김태영 국방부 장관 후보자 등 외교·안보·통일 정책을 책임진 각료들이 일제히 대북 협상을 견제하고 압박을 촉구하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
이런 태도에는 두 가지 착각이 깔려 있다. 하나는 북한이 압박에 굴복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대북 제재의 실질적 효과가 나타나서 북한이 다소간 대미·대남·대일 유화책을 쓰고 있다”고 한 이명박 대통령의 지난 15일 발언이 대표적이다. 정부 관계자들은 북한 조의방문단의 이 대통령 면담조차도 북한의 굴복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다른 하나는 대북 협상이 결국 실패할 거라는 협상무용론이다. 대화와 협상은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반면 협상을 하지 않는다면 사태는 더 나빠질 수밖에 없는데도, 정부 안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 기류가 강하다.
비핵·개방 3000 정책은 이제 모순이 극대화하는 지점까지 왔다. 치열한 협상 결과 이뤄질 핵 포기를 모든 것의 전제로 삼아서는 미국의 발목을 잡는 것 외에 할 일이 없다. 남북관계도 함께 희생돼, 한반도 관련 사안에서 우리 발언권이 더 위축된다. 현대와 북한이 금강산·개성관광 재개와 백두산관광 추진 등에 합의한 지 한달 이상 지났으나 후속 조처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임진강 참사라는 새 현안까지 생겼다. 그러면서 정부는 ‘남북 대화에서 핵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고 공허한 얘기를 한다. 우물에서 숭늉 찾기다.
핵을 포함한 북한 문제는 전반적인 한반도·동북아 새 질서 구축이라는 틀 속에서 볼 때만 해법이 나온다. 미국은 이런 사고방식에 익숙하다. 2000년 빌 클린턴 정부가 하려고 했던 게 그것이고, 2005년 9·19공동성명 내용도 그렇다. 정부의 위험한 착각은 일을 더 꼬이게 하고 한반도의 앞날에 대한 우리의 결정력을 떨어뜨리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한반도 정책에 관한 한 가온머리(컨트롤타워)를 넘어서 머리 자체에 문제가 있는 상황이다.
김지석 논설위원실장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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