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논설위원실장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중이다. 넉달 반 이상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여기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표면상의 임무이지만, 1994년 북-미 제네바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핵심 구실을 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을 연상시킨다. 버락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대치를 계속해온 미국과 북한이 마침내 본격적인 대화 국면으로 들어가려는 모습이다.
미국은 지난달부터 ‘포괄적 패키지’를 놓고 관련국들과 논의를 계속하고 있다.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 및 북-일 관계 정상화, 한반도·동북아 평화체제 구축, 대북 경제·에너지 지원 등 풀어야 할 모든 사안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한꺼번에 타결하기 위해서다. 게다가 미국과 중국은 ‘21세기 국제질서 주도’라는 큰 주제를 놓고 전략대화를 강화하고 있다. 이번 클린턴의 방북을 계기로 협상이 재개된다면 핵 문제의 근본적 해결 노력과 함께 한반도·동북아의 새 안보틀이 만들어지는 상황이 올 가능성이 크다.
지금과 비견되는 큰 전환기가 과거 두 차례 있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사이의 냉전 종식과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반의 미-중 데탕트가 그것이다. 당시 우리나라 정권은 주변국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면서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는 것으로 이에 대응했다. 그 결과 70년대 초반의 각종 남북접촉과 7·4공동성명 발표, 91년 남북기본합의서 발효를 정점으로 하는 남북관계 진전 등이 이뤄졌다. 하지만 이런 성과들은 안타깝게도 수명이 길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당시 정권들이 북한부인론을 극복하지 못한 데서 찾을 수 있다. 공식적으로 내세운 평화통일론과는 달리 북한 정권은 불법이며 곧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탓에 대화의 동력이 취약했던 것이다. 평화통일론이 실천적 기반을 가진 명실상부한 통일론이 된 것은 6·15공동선언 이후이지만 이런 흐름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는 끊겼다. 지난해 가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이상설이 나돈 뒤부터는 북한 체제가 무너질 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북한붕괴론이 성행한다. 북한부인론의 부활이다.
북한부인론은 전략이 아니라 적대적 정서일 뿐이다. 따라서 이에 기초해서는 통일정책은 고사하고 어떤 실효성 있는 대북정책도 세울 수 없다. 이에 집착할수록 남북관계는 더 나빠지고 한반도 관련 현안에서 우리 발언권은 더 약해진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빠르게 바뀔 때는 더욱 그렇다.
정부가 지금 상황에 대응하려면 두 가지를 나라 안팎에 분명히해야 한다. 하나는 북한붕괴론에 매달리지 말고 현실적인 대북정책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핵 협상 국면을 앞당기고 우리나라의 발언권을 높이려는 노력이다. 일본과 손잡고 미국의 대북 압박에 기대는 이제까지의 방식을 계속해서는 설 자리가 갈수록 좁아진다.
두 과제의 핵심에 자리한 것이 남북관계다. 이미 늦은 감은 있지만, 최대한 빨리 남북관계 전환을 통해 대북정책을 제 궤도에 올리고 핵 협상을 뒷받침해야 한다. 그간 악화일로를 걸어온 남북관계를 전환시키려면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한다. 이 대통령이 직접 10·4정상선언과 6·15선언에 대한 존중과 이행 의지를 분명히하는 것이 필수다. 이를 통해 일정한 신뢰가 구축되면 북쪽에 억류된 개성공단 직원, 금강산 및 개성 관광 재개, 이산가족 상봉, 교류·협력 강화, 인도적 지원 등의 문제는 한꺼번에 풀릴 수 있다. 곧 있을 8·15 경축사가 좋은 기회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남북관계와 한반도 비핵화 노력이 서로를 강화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갈 때가 바로 지금이다.
김지석 논설위원실장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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