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편집인
“하필왈리(何必曰利)!” 만나자마자 나라를 이롭게 할 방도를 묻는 양혜왕에게 맹자 역시 이렇게 되받는다. ‘왕께서는 어찌 잇속을 말씀하십니까.’ <맹자>의 첫 장 첫머리를 이루는 내용이다.
“왕께서 내 나라의 이익만을 생각한다면, 대부들도 마찬가지로 내 영지의 이익만 생각하고, 선비나 서민들도 이익만 생각할 것입니다. 위아래가 서로 다투어 잇속만 추구한다면 나라는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뻘쭘해진 양혜왕을 향한 경고는 계속된다. “만승의 천자를 시해하는 자는 필시 천승의 제후일 것이고, 천승의 제후를 시해하는 자는 백승의 대부일 겁니다, 모두가 더 갖기 위한 것입니다. 의를 경시하고 잇속을 중시한다면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어진 자로서 자기의 부모를 저버린 자가 없고, 의로운 자로서 임금을 무시한 자가 없습니다. 왕께서는 오직 인과 의를 말씀할 일이지 어찌 잇속을 말씀하십니까.”
달이 해를 삼키는 불온한 시대에 인과 의를 말하는 것이 부질없다. 정권은 족벌언론의 하수인이 되어, 족벌언론은 자본의 주구가 되어 제각각 오로지 잇속만 따지는데, 예수와 공맹이 다시 나타나 공의와 인의를 외친들 누가 들을까. 그러나 그 자신이 여당 지도부에 의를 공직의 신조로 제시한 것이 불과 7개월 전이니, 생판 모른 척 외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견리사의(見利思義) 견위수명(見危授命).” 뤼순 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안중근 의사가 유필로 남긴 <논어> 헌문편의 한 구절이다. 잇속 앞에선 의로움을 생각하고, 국가(혹은 이웃)의 위태로움 앞에선 목숨을 던지라는 것이니, ‘오로지 의’뿐이라는 맹자의 가르침과 정확히 통한다. 평생 잇속을 추구해 성공했고, 잇속의 유혹을 앞세워 최고 권력까지 획득한 그가 이 말을 꺼낸 것이 불가사의했다. 그러나 이 문장만큼 적절했던 충고는 없었다.
이명박 정부가 제시하고 추구했던 목표는 잇속이었다. 그래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학교에서 공동체까지 시장경쟁체제로 바꿔왔다. 초등생부터 경쟁을 가르쳐야 한다는 ‘리틀 엠비’ 공정택 서울시교육감의 발언은 그 상징이었다. 그 결과 집권 1년 반 만에 사회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 상태가 되어버렸다. 배려와 신뢰, 관용과 존중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오로지 잇속을 둘러싼 싸움뿐. 맹자의 경고 그대로였다.
자본은 수많은 영세 서민을 삶터에서 내쫓았고, 정권은 몸부림치는 이들의 절규를 불태워 버렸으며, 공권력은 그들의 저승 가는 길마저 가로막았다. 눈먼 자본과 무지한 정권의 잘못으로 일터가 파탄났는데도, 그 책임은 온전히 노동자에게 돌아갔고, 그나마 일터를 지키려는 이들과 그 가족은 벼랑 끝으로 떠밀린다. 온갖 방법으로 시민의 입을 틀어막으려 하더니, 이젠 눈과 귀를 가리려는 법안까지 날치기했다.
엊그제 이 대통령은 근원적 처방을 재론했다. 사실 그 처방전이 필요한 사람은 국민이 아니다. 늪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 그 자신이다. 잇속을 앞세운 만승의 천자는 천승의 제후에게 시해당한다고 맹자는 경고했다. 처방은 멀리 있지 않다. 중도실용이니 서민행보니 말장난이나 겉치레로 호들갑 떨 일이 아니다. 7개월 전 그가 설교한 바로 그 견리사의를 상기하면 된다.
인이란 이웃에 대한 사랑이요, 의란 그 사랑을 사회적으로 확장한 것이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줬다고 하는, 바로 그 가난하고 약한 이들이 존중받으며 안정된 삶을 살도록 부축하는 것이다. 잇속을 위해 날뛰는 족벌언론과 자본의 횡포를 막는 것도 마찬가지다. 헌문편은 이렇게 이어진다. “오래된 약속이라도 잊지 않고, 평생의 말로 여기고 이행하라.”
곽병찬 편집인chankb@hani.co.kr
곽병찬 편집인chankb@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