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선 논설위원
안경환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이 어제 ‘결국’ 사퇴 의사를 밝혔습니다. 안 위원장은 임기를 넉 달 가까이 남겨놓은 채 사임하는 이유를, 8월 초 열리는 ‘아시아·태평양지역 국가인권기구 포럼 연례총회’에서 ‘세계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 회장 후보국이 선출되는 사실과 연결했습니다. 현재 아이시시 부회장국으로서, 유력한 차기 회장국으로 거론돼온 우리나라가 후임 인권위원회 위원장을 조속히 결정해야 회장 후보국 선출 과정이 원활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안 위원장이 조기 사퇴 결정에 ‘결국’이란 말을 붙일 수밖에 없는 것은 현 정권이 국가인권위원회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온갖 방법을 동원해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현 정부와 인권위의 불편한 관계는 정부조직 개편 과정에서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만들려고 했던 인수위원회 때부터 시작됐습니다. 각계의 반대로 독립기구라는 인권위의 위상은 지킬 수 있었지만, 인권에 대한 현 정부의 인식수준을 드러낸 이 소동은 그 이후 우리 사회가 겪은 인권 퇴행을 예고했습니다.
인권위는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결정에 반대하는 촛불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의 인권침해 행위가 있었음을 지적해 정부의 눈 밖에 났습니다. 그 이후 행정안전부는 전체 직원의 절반 가까이를 줄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했고, 결국은 21.2%나 되는 44명을 줄이는 것으로 결말이 났습니다. 안 위원장은 이런 행안부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대통령 면담을 추진했지만, 이 대통령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인권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청와대와 인권위 사이엔 전혀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개탄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청와대 쪽이 귀를 막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권위를 좌익의 온상으로 여긴다는 이야기도 무성했습니다.
인권 상황을 감시할 인권위가 이렇게 축소되고 핍박받는 상황이니 실제 인권 상황의 퇴행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기본권 중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와 집회·시위의 자유가 질식할 수준에 이르렀고, 용산참사에서 보듯이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나선 이들은 숨진 사람들을 땅에 묻지도 못하고, 그들을 지지하는 신부님들이 거리에 내동댕이쳐지는 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당시 품격 있는 선진국가를 목표로 내걸었습니다. 또 한국의 브랜드 가치가 저평가돼 있다며 국가브랜드위원회까지 만들어 그 가치를 높이자고 역설했습니다. 미국 오바마 정부 대외정책의 바탕이 된 스마트 파워란 개념을 제시한 조지프 나이는 국가 사이의 관계에서 한 나라가 갖는 매력이 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며 소프트 파워의 힘을 강조했습니다. 이 대통령이 말하는 브랜드 파워와 비슷한 개념이지요. 그렇다면 한국의 매력 포인트는 무엇일까요. 바로 민족분단의 비극 속에서도 극심한 가난과 군사독재를 극복하고 민주화와 경제성장 그리고 인권 신장을 동시에 달성한 나라라는 점일 것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아이시시도 한국을 차기 회장국으로 유력하게 검토했던 것이겠지요.
그런데 현 정부는 우리의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스스로 포기하는 쪽으로만 움직여왔습니다. 그 때문에 아이시시 위원장으로부터 한국의 차기 회장국 수임이 무산될 수 있다는 경고까지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동안 크게 손상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회복”하는 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정국 이후 근원적 처방을 검토하고 있다는 이 대통령이 결단을 내리면 됩니다. 품격 있는 나라를 지향한다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일치시킬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권태선 논설위원kwont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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