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편집인
자공과 공자가 묻고 답했다. “정치란 무엇입니까?” “군사와 경제 그리고 백성의 신뢰(民信)를 든든히 하는 것이다.” “하나를 버린다면?” “군사다.” “또 하나를 버린다면?” “경제다. 예로부터 백성이 죽는 일을 겪지 않는 나라가 없었지만, 백성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존립하는 나라는 없었다.”
신영복 교수는 신(信)은 ‘사람의 말’을, 언(言)은 신에게 드리는 맹서를 뜻한다고 했다. 옛사람에게 말이란 진실과 언행일치는 물론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에 합당한 것이어야 했다. 장삼이사에게도 그러하기를 요구했는데, 하물며 군주에게 있어서랴. 말의 진정성은 왕조의 정통성과 정당성의 뿌리였던 것이다. 군주가 허튼 말로 백성의 신뢰를 잃을 경우 왕조는 반드시 망한다고 공자는 가르쳤다. 그보다 100년 뒤 태어난 맹자는 이것을 역성혁명론으로 한 걸음 더 밀고 나갔다.
현대 상품소비시대에 공맹의 언어관은 낯설기만 하다. 대중매체가 쏟아내는 말은 실재를 반영하기보다는 허상 또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허상에 사로잡힌 소비자는 상품의 사용가치가 아니라 이미지만 소비할 뿐이다. 이는 정치의 장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권력자 특히 독재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이미지를 조작하고, 가공의 적, 조작된 증오, 허황한 목표 따위를 만들어낸다. 거짓을 가리기 위해 더 많은 말, 더 많은 환상을 지어낸다.
박정희가 밀짚모자에 막걸리를 마시는 농민의 아들로 각인된 것은 좋은 실례다. 저임 노동자를 양산하기 위해 농촌을 파괴한 건 바로 그였다. 전두환은 집요하게 아이들 볼에 뽀뽀했지만, 광주 학살극의 장본인이라는 너무나 무거운 실재 탓에 자상한 아저씨의 이미지를 조작하진 못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강부자·고소영 정권에 대한 불만이 비등할 때마다 국밥집 할머니, 노점 할머니, 시장통 분식집을 쫓아다녔다. 소통이 아니라 서민 이미지만 필요했다.
그런 이 대통령이 ‘근원적 처방’이란 이름 아래 중도·서민·소통·변화라는 열쇳말을 내놨다. 지난해 이맘때 촛불정국에서 반성·성찰·소통·변화(정책전환) 따위의 말들을 제시한 바 있기에 새롭진 않다. 게다가 지난해 그 말들은 모두 이미지 즉 허상으로 끝나버렸다. 이번에도 그러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근원적’이란 수식어까지 붙였으니, 조금은 기대를 걸었다. 이미지 조작이 아니라, 이 정권이 추구하는 새로운 정신이 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미지용 허사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미 드러났다. 상인들 앞에서 그는, 유럽에선 재래시장 보호 차원에서 이미 시행해온 대형마트 규제에 대해 법 운운하며 난색을 지었다. 반면 서민에게 돌아가는 비과세 혜택을 없애 부자 감세로 말미암은 재정 결손을 메우는 방안을 추진할 태세다. 부축하는 척하며 주머니 터는 걸 ‘아리랑치기’라고 하던가.
자신에게 비판적인 조갑제류에 거리를 두는 것을 두고 중도 강화 운운한다. 뒤로는 땃벌떼, 서북청년단, 용팔이류의 극우폭력이 부활하는 것을 방조하거나 비호한다. 소통을 말하면서 교사, 공무원, 시민사회의 입을 틀어막는다. 권력은 물론 자본까지 이용해 정론에 재갈을 물리려 한다. 근원적 처방과 근본적 ‘생쑈’를 분간하기 어려운 것이다. 말의 진정성, 신뢰는 근본적으로 위협받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마지막 처방을 삼을까. 1953년 노동자 봉기를 무력 진압하고 선전선동을 독려하던 공산당 정권에 대해 브레히트는 이런 야유를 보낸다. “…인민이 어리석게도 정부의 신뢰를 잃었으니/ …차라리 정부가 인민을 해산하고/ 다른 인민을 선택하는 게/ 더 간단하지 않을까.” 동독 정권은 오래전 망했다.
곽병찬 편집인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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