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논설위원실장
헨리 키신저는 미국의 외교안보 분야 원로로, 실질을 중시하는 그의 판단은 정권 차원을 뛰어넘는 호소력을 갖는다. 협상을 통한 북한 핵문제 해결을 지지해온 그가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최근 한 기고문에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에 여러 차례 협상 기회를 줬으나 거절당하고 결국 두 가지 선택에 직면했다고 했다. 하나는 북한 핵 계획이 되돌릴 수 있는 선을 넘었음을 인정하고 핵 증강과 대외 확산을 막는 방안을 찾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관련국, 특히 중국의 적극적 참여를 통해 대북 압력을 최대화해 핵 계획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제안은 미국 내 여론이 강경 쪽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와 같다.
실제로 지금 오바마 정부의 대북 대응은 강경하다. 미국 주도로 유엔 안보리가 채택한 대북 제재 결의안은 대북 봉쇄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아울러 미국은 금융 제재를 포함한 독자 제재를 검토하고 있다. 북한은 이에 맞서 우라늄 농축 시작, 새로 추출한 플루토늄의 전량 무기화 등을 선언한 상태다.
그래서 지금 상황을 두고 ‘3차 북한 핵위기’의 시작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 핵위기는 1993~94년과 2002년 두 차례 있었다. 위기가 조성되는 양상은 비슷하다. 북한의 핵개발 의혹에 대해 미국이 군사 조처를 포함한 압박 강화를 공언하면서 긴장이 급격히 높아진다. 곧 북한의 핵 계획과 미국의 강경 대응이 핵위기의 핵심 요소다.
핵위기 돌입 이후의 경로는 두 가지뿐이다. 첫째는 키신저의 주장처럼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고 확산 차단에 치중하면서 압박을 통해 북한이 굴복하거나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둘째는 직접적 군사 대응이다. 그런데 첫째 방안은 과거에 이미 실효성이 없는 것으로 입증됐고, 둘째 방안은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 일단 핵위기가 본격화하면 출구가 없는 셈이다.
이런 때일수록 북한 핵문제의 근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북한이 핵을 추구하는 주된 이유는 체제 안보다. 북한이 아무리 허세를 부리더라도 동북아 나라 가운데 가장 약소국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반면 핵문제와 직접 연관된 미·중·러·일은 지구촌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국이다. 이런 비대칭적 상황에서 위기의식을 느끼는 북한이 살아남기 위한 택한 비대칭적 전력이 핵이다. 북한은 외부 압박이 거셀수록 핵에 더 매달릴 수밖에 없다. 자신의 능력과 의지가 핵개발의 필요조건이라면 외부 압박은 충분조건이다.
빨리 협상 국면으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은 대북 협상의 열쇠를 쥐고 있지만 일정한 한계 속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우선 국내 정치적 제약이다. 협상 효과가 빨리 나타나지 않으면 얼마 안 가 강경파의 반발이 거세진다. 국제적인 제약 요소도 있다. 특히 북한 문제의 국내정치 활용이 일상화한 일본은 협상에서 상당한 변수가 된다. 게다가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의 대중국 영향력도 떨어지고 있다. 한반도 문제에 집중할 동력과 전문인력 부족도 문제다. 오바마 행정부가 애초 포괄협상이라는 대북 정책의 큰 틀을 잡아놓고도 아직 구체화하지 못한 데는 동력 부족이 크게 작용한다.
역설적으로 미국의 이런 제약은 우리나라가 지렛대 역할을 강화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우리 정부의 의지가 어디로 작용하느냐에 따라 핵문제의 전체 양상이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내일 미국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당연히 3차 핵위기를 막고 핵문제를 근본적으로 풀기 위한 협상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가 돼야 한다.
김지석 논설위원실장jkim@hani.co.kr
김지석 논설위원실장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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