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편집인
한 소식 했다던 무위당 장일순 선생도 말년엔 오고감의 덧없음에 어지간히 허전했던가 봅니다. 작고하기 4년 전 어느 날, 선생이 살던 동네 산기슭에서 야생란 한 포기와 조우하고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늘은 1990년 입추/ 산길을 걸었네/ 소리 없이 아름답게 피었다가 가는/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난은 모양새로 보아 새우난인데, 늦여름에 꽃대를 올렸으니 한라산 원산의 여름새우난인 듯합니다. 선생을 부끄럽게 한 것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곳에서 저 홀로 피었다가 저 홀로 가는 새우난의 순명이었습니다. 고통받는 이들의 벗이고, 길 잃은 이들의 길잡이 노릇을 했던 선생이었지만, 자연에 온전히 내맡기지 못하고 내심 조바심치고 있었던 것을 문득 들킨 게지요.
선생은 돌아와 붓을 들어 난을 치고,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노라는 화제를 달았습니다. 그때 부끄러움 혹은 깨달음의 기억이 얼마나 강했던지, 사후 10년 뒤 후학들은 회고집을 펴내면서 이 화제를 책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순명에 대한 흠모의 정이 그만큼 오롯했던 게지요. 사실 마음의 어둠을 밝히는 데 그만한 등불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 고아한 난에서만 그런 순명을 볼 수 있을까요. 도심 속 포장도로라도 빈틈만 있으면 비집고 올라와 꽃을 피우고 번식하는 민들레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오가는 시민들의 무심한 발길에 무수히 차이고 밟혀도 민들레는 새파란 싹으로 봄을 알리고, 노란 꽃과 무수한 씨로 생명의 신비를 삭막한 도시민들에게 넌지시 일러줍니다. 밟히고 밟혀도 일어서고 또 일어서는 그 모습은 어쩌면 난보다 더 성스럽다 할 것입니다.
당신의 남편은 사실 민들레 같은 이였습니다. ‘저 들의 푸르른 솔’을 즐겨 노래하고 흠모했다지만, 그의 삶은 길거리에서 밟히고 또 밟혀도 온몸으로 저항하며 꽃을 피우는 민들레였습니다. 온몸을 던져 세상에 자신의 꿈을 퍼뜨린 그의 마지막마저 민들레 씨를 닮았습니다. 그 씨는 지금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서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반면 당신은 누추한 사립문 그늘에 핀 과꽃 같았습니다. 남편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그런 삶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비가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아들과 딸, 며느리와 사위, 손녀까지 외국으로 내보내야 했습니다. 그럴 리 없을 거라고 하소연했겠지만, 이전 대통령의 자식들처럼 꼬이는 파리 떼에 병들고 더럽혀질 것이 두려웠던 남편의 강권을 뿌리칠 순 없었습니다. 멀쩡한 자식을 유배 보내듯 떠나보내면서도, 한 푼 도움을 주지 못해 살림집까지 걱정해야 했으니 당신의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그 안타까움이 오늘의 이 사달을 불러오기야 했지만, 눈먼 권력자를 제외하고 세상의 어느 자식이 그런 어미의 심정을 모른다 하겠습니까.
엊그제 몸져누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철인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걱정하던 터였지만, 정작 닥치고 보니 그저 황망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당신에겐 아직 지키고 따라야 할 게 있습니다. 무엇보다 할아버지 영정 앞에서 브이(V) 자를 그려 보이던 서은이를 잘 보살펴야 합니다. 할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던 서은이에게 할아비의 삶과 꿈과 진실을 전할 사람은 바로 할머니입니다. 그가 죽음으로써 지키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일러줄 사람도 당신입니다.
지금 봉하 들녘엔 모가 벌써 거뭇거뭇해졌을 겁니다. 바가지 긁는 당신을 때론 훈육주임 혹은 마귀할멈 같다며 놀려대던 남편의 꿈은 그렇게 쑥쑥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밥이 되고 세상을 살리는 힘이 되도록 저 들녘을 지켜야 합니다. 부디 건강하셔야 합니다.
곽병찬 편집인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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