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칼럼
막말로 유명한 김영삼 전 대통령(와이에스)이지만, 1995년 11월 한-중 정상회담 뒤 한 발언만큼 거친 것은 없었다. 한 일본 각료의 과거사 망언에 대해,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반드시 고치겠다고 공언했던 것이다. 군통수권자가 이렇게 공표했으니, 군은 울며겨자먹기로 F-16 편대로 하여금 독도 주변을 초계비행하도록 했고, 해군은 인근 해역에서 기동훈련을 벌이는 한바탕 쇼를 했다.
호기로운 버르장머리 발언의 후과는 치명적이었다. 일본 투자자들이 한국에서 빠져나갔고, 외환위기가 가시화하자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지원 요청을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리고 1998년 1월 신한일어업협정을 파기했다. 한국의 실효적 지배 아래 있는 독도를 분쟁지역화하자는 일본의 의도는 적중했다. 비즈니스 외교를 표방했던 와이에스는 실리와 명분을 모두 잃고 대한민국의 품격까지 짓이겨 버렸다.
사실 와이에스의 평소 막가는 버릇을 알았다면 일본 정부가 그렇게까지 보복하진 않았을지 모른다. 그가 정치에 입문하고부터 지켜온 원칙은 응징이었다. 거역하거나 등돌리거나 대드는 사람의 버르장머리는 반드시 고친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되자 이런 원칙을 국제관계로 확장시켰을 뿐이다. 북한에 대해선 이미 버르장머리 고치기에 나섰던 터였고, 직접 협상을 벌이던 미국에 대해서도 버릇을 고치려 들었다. 민족이 이념보다 우선한다던 취임 초 대북정책 기조는 단지 버릇없음 때문에 간단히 폐기되고, 봉쇄와 압박으로 180도 돌아섰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게도 구럭도 다 잃는 것이었다. 막대한 경수로 분담금만 덤터기 쓰고, 북핵 논의에선 완전히 왕따가 되었다.
지금도 버르장머리 운운하며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물론 촛불 시민들을 비난하곤 한다. 제 자식이나 제 패거리 공천 안 했다고 한나라당의 버릇도 문제 삼았다. 그 버릇 개 줄까마는, 이젠 측은감만 불러일으킨다. 문제는 이런 버릇이 이 정부에서도 발현됐다는 것이었다. 슬로건은 실용이었지만, 껍데기만 한 꺼풀 벗기면 이념 혹은 종교화된 독선과 오기투성이였다. 특히 북한에 대해선 그랬다. 무시와 압박 혹은 봉쇄로 단위를 높여왔다. 그러면 버릇없는 북한이 머리를 굽히고 들어올 것으로 확신했다. 미국은 물론 중국이나 옛소련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을 꿈꾼 것이었다. 오기와 독선에 무지까지 겹친 셈이었다.
엊그제 결국 북한이 개성공단 계약에 대해 무효 선언을 했다. 원점에서 재협상하든가 아니면 짐 싸서 나가라는 것이었다. 책임이야 양쪽이 오십보백보이지만, 대량파괴무기 확산방지구상(피에스아이) 참여를 공언했다가 당한 결과라는 점에서 남쪽의 오기 탓이 컸다. 북쪽의 경고에도, 정부는 피에스아이를 버릇 고치기에 좋은 수단으로 착각했다. 결국 10여년에 걸쳐 쌓아올린 남북관계의 안전판은 물거품의 위기에 처했다. 그렇게 안 되려면 이쪽에서 허리를 굽혀야 한다. 난감한 일이다.
골수염으로까지 표현되는 한나라당 내분도 마찬가지다. 경선 때의 원한 때문인지 이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표의 버릇 고치기로 일관했다. 북한을 대하는 태도와 다를 게 없었다. 총선이나 재보선 공천에선 물론이고, 자리 챙기기에서도 ‘친박’은 국물도 없었다. 이제는 때이른 권력투쟁으로 발전했고, 당권을 통째로 주지 않고는 화해가 불가능하게 됐다. 야당과의 관계도 그렇다 보니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고, 되는 일도 하나 없었다.
남의 버르장머리 트집 잡을 계제가 아니다. 제 버릇이나 반성해야 한다. 정체가 모호하긴 하지만, 제발 실용이라는 초심으로라도 돌아와야 한다. 버르장머리 고치려다 패가망신한 와이에스의 전철을 밟을 이유는 없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