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칼럼
시작은 별 볼 일 없었다. 고작 여자 기숙사 출입을 개방하라는 것이었다. 사랑의 자유를 허락하라고 소리쳤지만, 배부른 자의 하품 같았다. 그러나 시위 동력은, 부자를 위한 교육제도, 빈약한 복지제도, 고용 불안, 상품사회와 소외 그리고 젊은이를 사지로 몰아넣는 패권주의의 부활 등 구체적인 고통이었다. 시위는 계속됐고, 곧 비싼 등록금과 학생 선발제도, 대학의 권위주의 등의 문제로 확대됐다.
시위가 전국 대학으로 확산되자 당국은 낭테르대학을 임시 폐교했다. 이는 오히려 학생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마침 미국이 북베트남을 침공했고, 학생들은 패권주의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뱅크 파리지점을 점거했다. 정부의 대대적인 시위 진압을 불러왔지만, 오히려 노조의 총파업 등 노·학 연대를 촉발시켰다.
이런 진화 과정을 상징하는 68혁명의 슬로건이 ‘개별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관습적 차별, 일상적 금기와 통제는, 실은 권력관계를 유지·강화하려는 정치적 문제라는 인식이다. 기숙사 출입 문제는 등록금·교과과정·권위주의 문제로, 일상적 금기의 문제는 자본과 권력의 억압의 문제로, 소비문화의 문제는 자연과 생명의 약탈 문제로, 정치적 권위주의는 패권주의 문제로 확장된 것이다.
시대의 비참만을 따진다면 오늘 우리 대학생이 처한 현실만큼 끔찍하진 않았다. 지옥 같은 입시 관문을 지나면, 1000만원대 등록금 절벽에 부딪힌다. 등록금을 내기 위해 대학 생활을 알바와 인턴 따위로 전전하다보면 졸업이다. 그러나 졸업은 탈출이 아니라 진짜 절망의 시작이다. 청년층 체감실업률은 21%(국회예산정책처)에 이른다. 노동부 공식 실업률(8.7%)의 2.5배다. 교육과학기술부 조사로는 지난해 대졸자 55만명 가운데 정규직 취업자는 28만명에 불과했고, 올해는 이보다 20% 정도 더 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암울한 것은 이런 상황을 개인의 문제로 개별화시키는 현실이다. 학생들은 자본과 권력이 기획한 트랙에 올라 호루라기 소리에 따라 선착순 경쟁을 벌이는 데 익숙하다. 반드시 90%는 탈락하는 구조인데도, 발을 못 뺀다. 초등생 때부터 길들여지는 탓인지, 대학생쯤 되면 호루라기에 조건반사로 반응한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19세기 초, 증기기관으로 돌아가는 맷돌에 숨어 있는 ‘악마’를 보았다.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20세기 중반 맹목적 시장주의를 인간과 자연 그리고 사회 자체를 파괴하는 악마의 맷돌이라고 규정했다. 그 속에 들어가면 인간성, 사회성, 공공성, 생명은 밀가루처럼 짓이겨져 상품이 된다는 것이다. 세계는 이 악마의 맷돌에 짓이겨지고 나서야 최근 시장을 사회적 통제 아래 두려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거꾸로다. 인간과 자연, 특히 새로 사회에 진입하는 학생들을 맷돌의 주둥아리에 디밀어넣을 궁리만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자본은 끊임없이 욕망을 조작하고, 권력은 시장 신화를 세뇌한다.
68혁명은 권력의 쟁취라는 측면에서 보면 실패했다. 그러나 의식과 가치와 삶의 변화를 따진다면 이만한 사건은 없었다. 대학을 국유화시켰으며, 사실상 무상 교육을 실현했고, 사회적 일자리를 늘렸으며, 복지제도를 확충했다. 환경운동, 반전반핵운동과 함께 녹색당을 탄생시켰고, 정통적 좌파와 우파에 대한 혁신을 이끌었다. 지난해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68혁명의 청산을 선언했다가 큰코를 다쳤다.
이제 우리도 개별화의 주술에서 벗어나야 한다. 악마의 맷돌은 운명적인 것도 개인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다. 따라서 정치적 행동으로 해결해야 한다.
곽병찬 논설위원chankb@hani.co.kr
곽병찬 논설위원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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