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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곽병찬칼럼] 조롱할 일이지 왜 죽어

등록 2009-03-25 09:56수정 2009-03-25 16:38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 칼럼
성을 둘러싼 권력관계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봉건왕조의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었다. 사내종(奴)이건 계집종(婢)이건 모두 계집 녀(女)가 붙어 있다. 민주공화정을 참칭하던 독재정권에서 성의 지배자는 권력이었고,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이 지켜지는 체제라도 자본주의에선 돈이 성의 지배자다.

지금도 치를 떠는 사람이 있듯이, 독재정권 아래서 연예인은 봉건사회의 관기나 다름없이 성적 착취를 당했다. 아프리카의 한 대통령은 한국 군사정권의 손님 접대가 얼마나 융숭했던지 틈만 나면 한국을 방문했다. 그가 올 때마다 찾는다는 인물은 이미 당시에도 소문이 자자했다. 박정희가 피살되던 날 마지막 만찬 자리에도 앳된 여인들이 그들 곁에서 술도 따르고 노래도 불렀다. 영화감독 하명중씨의 이야기를 빌리면 당시 청와대 경호실은 연예인의 대기소였다. 심지어 백주 대낮에도 기관의 지프가 영화 촬영장에까지 들이닥쳐 여배우를 실어 갔다고 한다.

정보기관엔 이런 일을 전담하는 자까지 있었다. 이들은 여자 연예인의 신상을 관리하면서, 최고 권력자가 필요로 하거나, 외빈을 접대하는 데 필요하면 언제 어디서건 점 찍힌 연예인들을 대령했다. 현대판 채홍사였다. 상전이 이러하니, 그 밑의 아전들도 연예인을 노리개로 삼았다. 눈 밖에 나면 스타 연예인이라도 영화나 방송 출연은 물론 라디오에 이름 석 자 올리지 못했다. 광고(시에프) 모델은 언감생심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반면 눈에만 잘 들면 신인이라도 스타덤에 오르는 건 시간문제였고, 연말 각 방송사가 주관하는 연예 관련 상은 선물로 주어졌다.

권력이 민주화됐다고 좋아할 일은 아니다. 독재권력은 무지막지하긴 했지만, 그래도 주고받는 게 깨끗한 편이었다. 그 뒤를 이어 지배자로 등장한 돈은 연예인을 아예 노비로 사버렸다. 그의 요구에 따라 술을 따르고, 웃음을 팔거나, 옷을 벗고, 몸을 허락하는 걸 거부할 수 있는 연예인은 드물다. 독재정권 때보다 민주화 시대에 더 많은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은 돈에 의한 인격 파괴와 성 착취가 얼마나 더 가혹한지를 잘 보여준다. 연예인이 자살하면 대개 우울증 탓으로 돌렸다. 우울증을 피할 수 없게 만든 먹이사슬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죽음으로 그 부당함을 알리게 된 장자연씨의 고백 문건이 드러나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은 거기에 주목했다.

지금은 자주 흥얼거리지만, 애초 손담비의 ‘미쳤어’는 별로 내키는 노래가 아니었다. 진부한 사랑 넋두리, 상투적 멜로디의 반복, 말초적인 춤. 노랫말, 멜로디, 춤 모두가 따로 놀았다. 그러나 새롭게 보이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반복되는 ‘미쳤어, 정말 미쳤어’는 저만의 생명력과 완결성을 갖는 노래였다. 세상을 강력하게 조롱하는 주문과도 같았다. 다른 넋두리는 이를 위한 포장일 뿐이다. 춤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건 이를 통해 세상의 관음증과 성 도착을 까발리기 위한 것이었다. 평소 근엄했던 자들도 그 앞에서 입을 헤 벌리고 침을 흘리며 눈동자가 풀렸으니, 이 얼마나 통쾌한 까발림이고 조롱인가. 엉터리 해석인지 몰라도, 내게 ‘미쳤어’는 돈과 권력이면 만사형통인 변태 사회,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 인간에 대한 강력한 똥침이었다!

설사 돈과 권력의 호출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도 자학만 해선 안 된다. 비난받아야 할 자는 사람을 성 노리개로 취급하는 변태들이다. 영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고, 권력으로 양심을 유린하겠다고 덤비는 성 도착자들이다. 돌아서 눈물이 쏟아지더라도, 노래로 혹은 연기로 ‘미친, 정말로 미친’ 세상을 조롱하고 또 조롱할 일이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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