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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곽병찬칼럼] 엠비 사화(史禍)

등록 2008-11-18 21:11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칼럼
아무리 야만적인 권력자라도 조선의 연산군과 비교되는 것만큼은 싫어할 게다. 재임 중 쫓겨났다는 사실 때문에라도 기분이 나쁘겠지만, 패륜과 교활, 폭력과 배반, 모략과 방탕 등 패덕의 조건을 모두 갖춘 인물의 전형으로 꼽히니 더욱 그렇다. 그렇게 기록된 데는 그의 패악질 외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실을 수집하고 평가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언관과 사관을 그처럼 무참하게 참살한 이는 없었다.

그에게서 시작된 사화(士禍)는 왕권과 신권, 신권과 신권, 외척과 외척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최종적인 피해자는 선비였다. 그래서 선비 사(士)를 쓴다. 단 무오사화만큼은 ‘史禍’로도 쓰이는데, 그건 사초가 발단이 됐고, 숙청당한 선비가 사관과 언관이었던 까닭이다.

계유정난 공신들이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과 부를 누리자, 성종은 영남 사림파를 대거 발탁한다. 사림파는 홍문관·사간원 등 언론기관에서 활동하며 훈구파의 비정과 비위를 탄핵한다. 춘추관에서 조정과 왕실의 행적을 기록하고 실록 편찬을 했다. 그러니 이들은 왕은 물론 대소 신료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연산군과 훈구파는 끔찍이도 불편했다. 결국 이들은 김일손이 성종실록 사초에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올린 것을 빌미로 일제히 숙청한다. 세조에서 연산군에 이르는 왕권의 정통성을 부정했다는 이유였다. 김종직은 부관참시, 사관 김일손·권오복·권경유 등은 능지처사에 처해졌다. 6년 뒤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은 사림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홍문관과 사간원을 아예 폐쇄했다.

아는 이야기다. 문제는 500여년 전 벌어졌던 이런 일들이, 전제국가가 아닌 민주공화국에서도 계속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전제왕조 때처럼 멋대로 인신을 구속하고 극형에 처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정권이 역사를 제멋대로 재단하고 매도하며, 사초를 수집하고 평가하며 기록하는 언관과 사관을 통제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무고를 일삼고, 막무가내로 정통성 시비를 걸어 ‘좌빨’로 단죄하는 유자광과 같은 무리가 득실대는 것도 비슷하다.

문제는 최고 권력자다. 그가 균형을 잡는다면 차단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러나 지금의 권력자는 “(교과서가) 정통성을 훼손했다” “(방송을) 중간으로 돌려놔야 한다”며 한술 더 뜬다. 권력이 학문과 교육과 언론을 멋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는 500여년 전보다 위험하다. 연산군은 자신이 포함된 왕권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로 사화를 일으켰다. 이에 반해 이 정권은 아예 근현대사의 뼈대를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쪽으로 전복시키려 한다. 이승만과 다른 노선을 걸은, 원조 우파인 김구 선생이나 김창숙 선생도 좌빨로 몰고 싶지만 염치가 없을 뿐이다.

근현대사에 대한 이들의 쿠데타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됐다. 교육부는 출판사와 필자의 손목을 비틀어 교과서 수정 압력을 가하고, 국사편찬위는 이를 위한 엉터리 논거를 개발했으며, 시도 교육감에게는 채택 거부 압력을 행사하도록 채근했다. 시도 교육감들은 교장들을 불러 국가 정체성 교육을 시키고, 일제 식민체제와 독재 예찬론자인 관변학자들을 동원해 학생들에게까지 주입시키려 한다.

그야말로 광란이다. 학계나 교육계가 이렇게까지 농락당한 적은 없다. 그래서 혹자는 무자년에 벌어진 근현대사의 변고라 하여 ‘무자사화’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사화를 주동한 가해자의 신분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며 ‘명박사화’라고 하자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든 기억할 게 있다. 사관을 참살한 연산군은 쫓겨난 것은 물론 역사의 죄인으로 남아 있다.


곽병찬 논설위원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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