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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곽병찬칼럼] “책임을 맡기고 싶지 않다”

등록 2008-10-28 21:12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칼럼
“저는 참으로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그의 시정연설을 들으면서 떠오른 느낌은 이랬다. 아, 그는 자신을 모세나 여호수아쯤으로 생각하는구나. 온전히 신의 부름에 헌신하며, 민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시나이의 광야를 가로질러 가나안으로 간 사람. 맞아, 그 정도는 돼야 이렇게도 말할 수 있었겠지.

“국민의 고통은 저에게도 뼈저린 아픔입니다.”

그런데 고통은 누가 가져온 거지? 그가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미국의 금융위기에서 시작된 것이긴 하지만, 사태가 터지고 계속 헛발질한 건 누구였지? 펀드를 사겠다고 한 그의 말을 믿고 펀드에 가입한 사람들일까. 아니면 위기다, 아니다, 위기다, 아니다를 반복한 그의 말에 요동쳤던 사람들일까. 그는 지금 겪는, 앞으로 더욱 커질 고통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확신한다. 그러니 백성의 고통을 그저 아파하고 연민할 뿐이다. 이렇게 너스레를 풀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게다.

“대한민국만큼 어려움 앞에서 모두가 힘을 합친 아름다운 전통을 가진 나라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외환위기 때 장롱 속의 금붙이를 꺼냈던 그 손, 검은 태안반도를 씻어낸 그 손이 바로 대한민국을 구했습니다. 품앗이와 십시일반, 나아가 위기를 만나면 굳게 뭉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유전자입니다.”

수사가 좀 유치하지만, 맞는 말이다. 그러나 영 기분이 안 좋다. 책임질 자들은 여전히 호의호식하고 호령만 하고 있는데, 날벼락 맞은 국민들더러 다시 한 번 길거리에 나앉을 각오를 하라고? 위정자의 잘못으로 일쑤 쪽박 차긴 했지만, 그게 우리 국민의 유전자는 아니다. 착각이 이 정도였으니 감히 이렇게 독려했을 것이다.

“중소기업과 대기업은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노와 사의 화합만큼 더 소중한 것도 없습니다. 수도권과 지방은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시민사회와 종교계도 갈등 해소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염치는 어디다 둔 걸까.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래, 재벌과 대기업만 비호한 게 누구였지? 노동자의 팔다리는 꽁꽁 묶어두고, 사쪽엔 경찰까지 붙여준 게 누구였으며, 수도권 집중 규제를 푼 게 누구고, 시민사회를 쥐잡듯 소탕하고, 자신이 믿는 신에게 국가까지 봉헌하려던 게 누구였지? 이 정도는 기억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마지막까지 소명 운운한 걸 보면 기억력 탓도 아닌 것 같다. 메시아로 생각하는 것이다. “제가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앞장서겠습니다.”

솔직히 그에게 책임을 맡기고 싶지 않다. 책임은 책임질 줄 아는 사람에게 맡기는 법이다. 그는 믿을 수 없다. 믿음은 진정성에서, 진정성은 진실한 자기 고백에서 나오지만, 그는 진정성도 자기 고백도 없다. 연설문 작성자의 실수인지 몰라도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는 루스벨트의 말만 인용하지 않았어도 조금은 나았다.


루스벨트는 그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대공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빨갱이라는 비난까지 들어가며,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했고, 눈먼 금융시장을 통제했으며, 부유층에 대한 세금을 크게 늘려 사회안전망을 확충했다. 그러나 그는 부유층과 투기꾼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감세 정책을 추진하고, 노동자의 권리는 위축시키고, 취약한 사회 안전망마저 흔들고, 최소한의 자본 통제마저 풀려고 한다. 오로지 경제위기까지도 친북좌파 탓으로 돌리며, 권력 강화에 전념했다. 방송과 교육을 홍보수단으로 만들고, 정보기관과 권력기구를 사냥개 혹은 시녀로 복원시켰다. 요컨대 좌익 척결을 빌미로 민주주의를 척결했다.

그새 잊었을까 반복한다. 그에게 책임을 맡기고 싶지 않다.

곽병찬 논설위원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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