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선 논설위원
권태선칼럼
자기만의 시간, 자기만의 방을 갖겠다는 엄마의 꿈은 아직도 지나친 것인가? 40년 가까이 아내로서,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의무를 다하느라 자신을 잊었던 한 주부의 안식년 요구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주말연속극 ‘엄마가 뿔났다’의 마지막 회에서 아들은 아내의 유산기를 엄마의 휴가 탓으로 돌리며 엄마에게 대든다. 변호사인 딸은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서도, 엄마에겐 “희생의 다른 단어인 엄마”로서 살라고 요구한다. “어차피 버린 몸” 아니냐는 것이다.
40년을 헌신으로 살았던 엄마의 휴가는 가족들에겐 엄마의 ‘당연한’ 희생 위에서 누리던 안락을 빼앗아 가기에 불편하기만 하다. 그들의 머릿속에 꿈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의 엄마의 존재는 없다. 그러기에 ‘엄뿔’의 자식들은 엄마를 모른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 그러니 엄마가 뿔날 수밖에.
엄마를 모르는 건 그들만이 아니다. <창작과 비평>에 연재 중인 신경숙의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에서도 딸은 엄마를 모르겠다고 한다. 소설에선 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엄마를 잃어버린 뒤 그를 찾는 과정에서 딸과 아들, 그리고 남편의 회상을 통해 엄마를 되살려보지만, 결국 가장 사랑하는 딸조차 이름, 생년월일, 인상착의를 제외하곤 “엄마를 모르겠어, 정말”이라고 토로할 수밖에 없다.
신경숙은 결국 새가 된 엄마의 영혼의 목소리를 통해 자식을 통해서나마 자유롭고 싶었던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파 했던 사람, 그리고 사랑하는 이 앞에선 기품있게 보이고 싶어 했던 여성을 그려낼 수 있었을 뿐이다. 엄마는 ‘배울 만큼 배우고 남이 부러워하는 능력을 가진’ 딸이 아이 셋을 키우며 정신 없이 사는 모습을 보고 “왜 그리 꼬질꼬질 사는지 보고 싶지가 않았고나”라고 했던 까닭은 딸이 “더 맘껏 자유로워지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막내딸이 초등학교 들어갈 때야 비로소 글을 익혀 이름표를 써 줄 수 있었던 엄마에게도 “급물살 때마다 뗏목을 가져다 물을 무사히 건너게 해주던 내 인생의 비밀”인 동무가 있었고, 그 앞에선 기품있는 사람이고 싶었다고도 했다.
우리네 엄마도 이렇듯 삶에 대한 자신만의 꿈과 소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우리는 모른다. 아이를 키우고 살림에 골몰하느라 때론 잊거나, 아쉬워하며 살아가지만 결코 온전히 그것을 포기한 것은 아님을 모른다.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시간’에 대한 요구는 억눌렀던 소망에 대한 갈구가 목까지 차올라서임을 모른다. 아니 모른 척한다. 그러나 엄마는 “평생 처음 가져보는 나만의 방”에서 컴퓨터를 배우고, 책을 읽고, 가족과 세상에 대해 성찰하는 일기를 쓰면서 비로소 행복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일찍이 <자기만의 방>이란 글에서 여성이 한 인간으로 서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성찰하고 책을 읽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강물 속에 깊이 담글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과 공상과 성찰을 할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 자기만의 방”이라고 했다.
드라마 ‘엄뿔’은 60대인 엄마 세대와 달리 딸 세대는 자기의 삶에 더 충실할 것이라 시사했다. 그러나 자기만의 시간, 자기만의 공간이 삶을 사유하고 성찰하기 위한 것이라면, 반드시 그럴 것 같진 않다. 자식을 경쟁체제의 앞줄에 서게 하는 일을 유일한 삶의 목표로 생각하는 이땅의 많은 젊은 엄마들에게 그런 성찰의 공간과 시간이 존재하는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생각할 때 엄마의 뿔은 소중하다. 그 뿔은 엄마, 아내, 며느리이기에 앞서, 자신의 꿈을 기억하는 성찰적 인간의 표시니까.
권태선 논설위원kwonts@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