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칼럼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하고, 미래도 지배한다.” <1984년>에서 오세아니아를 장악한 당의 슬로건이다. 기록의 지배로 기억을 지배하고, 권력을 영구화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오세아니아에서 최고의 금기는 일기, 곧 개인의 생각과 행적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이다.
기억의 지배는 적에 대한 맹목적 적개심, 지배집단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이끌어낸다. 증오의 대상인 유라시아가 둘도 없는 우방이었다는 사실을 인민은 기억하지 못한다. 인민을 파탄으로 이끈다는 골드슈타인에 대해 누구도 그 실체를 의심하지 않는다. 당은 이들을 정기적으로 티브이 화면에 등장시켜 인민을 집단적 증오와 광기로 몰아넣는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가 힘이라는 구호를 진실로 받아들이게 한다.
오웰이 1948년 그린 이 디스토피아는 1984년으로부터 24년이나 흐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한반도의 남북 두 지배 집단은 경쟁적으로 이런 세상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현하려 했다. 빨갱이와 북괴, 반혁명 분자와 미제국주의는 조작된 증오의 대상 골드슈타인이나 유라시아와 같은 것이었다. 정권은 이 괴물을 빌미로 전국민의 의식을 검열하고 행동을 통제했다. 남쪽의 반공법·국가보안법, 북한 형법의 반혁명범죄 조항은 이런 기억의 통제장치다.
역사는 기억 혹은 망각과의 투쟁이라고 한다. 부당한 정권은 정당성을 확보하고, 권력의 유지 확대를 위해 기억을 왜곡하고 조작한다. 역대 독재정권은 이 문법에 충실했고, 실제 왜곡된 기억은 이들에게 집권 연장의 발판이 되었다. 이에 대해 민중은 망각된 기억을 되살리고, 왜곡되고 조작된 기억을 바로잡고자 권력과 맞섰다. 남쪽의 민중 혁명과 시민 항쟁은 그 연장선에 있다.
남쪽 사회는 이를 통해 성숙한 민주주의와 인권의식으로 이 디스토피아를 극복하는 듯싶었다. 역사적 사실의 복원·판단·평가는 온전히 학계에 넘겨졌다. 권력이 여기에 간섭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았다. 근현대사 교과서가 검정체제로 바뀌고, 교과서 채택을 교사와 학교운영위 교장 등 학교 구성원이 맡도록 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였다. 독재정권이 지워버린 기억의 복원을 위한 각종 위원회도 만들어졌다.
이런 노력은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함께 졸지에 수포가 되고 있다. 이 정부는 출범 이후 역사 교과서 수정을 통한 기억의 왜곡에 총력을 기울였다. <1984년>에서처럼 권력이 직접 사실을 판단하고 해석하는 권한까지 행사하려 한다. 이런 일에는 흔히 어용교수를 동원하지만, 이 정권은 최소한의 염치마저 포기했다. 시도 교육감까지 동원해 채택률이 가장 높은 근현대사 검정 교과서를 채택하지 않도록 압박함으로써 학교 자율화의 허구성을 스스로 드러냈다.
그런데 이 작업은 정권 출범 이전부터 진행돼 왔다. 보수 우익의 이데올로그를 자처하는 정치교수들은 전공과 상관없이 대안교과서 집필에 나섰고, 재계는 출간된 책자를 사들여 집단 배포했고, 수구 언론은 이념 전쟁을 도발했다. 일본에서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하는 짓과 똑같았다. 자학사관을 극복하고 승리한 역사, 밝은 역사를 보여줘야 한다는 지침도 같고, 이 지침을 구현한 식민지 근대화론도 답습했다. 새역모가 군국주의의 부활을 꾀하듯이, 이들은 독재자들의 부활을 꿈꾼다. 건국절 제정 요구는 그 일환이었다.
사실 ‘이명박 대통령’은 정치·경제·언론 등 권력 복합체에 의해 탄생했다. 그에게 기억의 지배에 대한 요청이 먼저 떨어진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이런 사실마저 지우지는 못할 것이다. 기억을 지배하려던 자들은 모두 비명에 갔다.
곽병찬 논설위원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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