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칼럼
아무리 발버둥쳐도 앞사람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용을 쓰면 쓸수록 팔다리는 허공에서 허우적거린다. 다시 돌고, 또 돌고, 목구멍에선 쓴 물이 올라오고, 눈앞이 뱅뱅 돈다. 빠른 자는 한두 바퀴로 끝나지만 느린 자는 끝까지 돌고 또 돈다.
군대에서 선착순의 기억은 여전히 악몽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선착순이 공정하고 합리적이라고 믿는다. 기회와 조건이 동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착각이다. 선착순이 공정한 경우란 동일한 신체와 체력 조건을 전제할 때다. 하지만, 그런 경우란 존재하지 않는다. 타고난 체력이 약하다고 더 괴롭히는 것을 합리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사람에겐 각자 타고난 능력과 자질이 있다. 체력이 약하지만, 사격을 잘하는 이도 있고, 잘 뛰지는 못하지만, 운전을 잘하는 이도 있다. 취사에서 실력을 발휘하는 이도 있고,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드는 데 탁월한 사람도 있다. 달리기 하나만으로 우열을 가리려는 것은 폭력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엔 군의 선착순보다 더 가혹한 경쟁 구조가 있다. 지필고사 성적순이 그것이다. 세상에 외우는 건 못해도 창의력이 뛰어난 아이가 있고, 지필고사 성적은 떨어져도 운동을 잘하는 아이가 있다. 수학은 못해도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아이도 있고, 체력이나 성적도 떨어지지만, 이웃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른 아이도 있다. 이런 아이들의 잠재력이나 자질을 영어나 수학 문제풀이만으로 평가할 순 없다. 이런 기준을 적용하다 보면 아이들의 각자 타고난 자질은 죽어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공정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선착순과 달리 아이들끼리 경쟁하는 구조도 아니라는 점에서 더 열악하다. 성적순은 아이가 부모의 등에 업히거나, 부모 손에 이끌려 달리는 구조다. 사교육 등에서 부모의 충분한 조력을 받는 아이는 앞서 달리겠지만, 저 혼자 뛰어야 하는 아이들은 뒤처질 수밖에 없다. 애초부터 불공정 구조다. 지난해 서울대 신입생 가운데 소득 수준 상위 10% 가정 출신은 전체의 40%에 이르렀다. 상위 20%는 60%였다. 최하위 10% 출신은 2.8%에 불과했다. 장학금을 신청한 45% 가량의 신입생만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이니, 나머지까지 포함하면 그 격차는 더 커질 것이다.
상위 10~20%가 성적순의 공정성과 합리성을 주장한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나머지 80%가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건 이해할 수 없다. 지난번 서울교육감 선거에서 똘똘 뭉친 상위 20%가 경쟁지상주의를 내건 공정택 후보를 당선시켰다. 나머지는 어영부영 방조했다. 공 교육감은 초등생 때부터 국가가 경쟁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선 빈부 분리교육도 불가피하다고 믿는다.
500원짜리 주택복권의 기댓값은 143원이다. 사는 순간 357원을 버린다. 물론 일확천금을 기대할 순 있다. 그러나 로또 1등 당첨 확률은 814만분의 1이다. 슬롯머신도 비슷하다. 이런 도박에 주로 빠지는 사람은 상위 20%가 아니라 나머지 80%다. 열심히 로또를 긁거나 ‘빠찡꼬’ 버튼을 누르면 인생역전의 기회가 오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성적순의 주술에 걸리는 심리적 배경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내 자식은 다르다. 더 노력하면 더 좋은 성적을 얻어 계층 상승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집에선 부모와 아이가 함께 뛴다! 명문대에 가려면 상위 1%에 들어야 한다. 가난한 아이에겐 복권 당첨만큼이나 어렵다. 경쟁교육 이데올로기는 상위 20%가 계층 고착화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주술이다. 여기서 풀려나지 않고는 80%의 아이들에겐 미래가 없다.
곽병찬 논설위원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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