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삶의창
울 엄니/ 저승 가는 길에/ 어여쁜 외아들 나에게 말씀하셨다// 내 제사상에는 이것저것 풍수없이 놓지 말고/ 기름 좌르르르/ 투구 대가리로 푼 이밥에다가/ 숟가락 꽂아도 자빠지지 않게/ 고깃국 한 그릇만 아귀 맞춰 놔다오// 비는 내리고/ 아내가 오늘 밤에도 국그릇 꾹꾹 눌러 쟁인다 맛도 없는 쇠고깃국
오래 전 내가 쓴 <제삿날>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둘째 연은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가 늘상 내게 종주먹 들이대며 하신 말씀을 거의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불효막심 임종조차 지키지 못해 마지막 말씀 받지 못한지라 나는 늘 위의 그것을 어머니 유언이라 여기고 산다. 어머니 돌아가시면서까지 꿈꾸던 호강이라는 게 어연번듯한 고대광실이나 황홀난측한 비단옷이 아니라 겨우 쌀밥에 ‘숟가락 꽂아도 안자빠지게’ 담은 고깃국 한 그릇이라는 게 마음 아파 나는 어머니 제삿날 되면 매양 황황하다 못해 울적하게 하루를 보낸다.
예전이야 ‘갈비’나 ‘등심구이’ 따위의 음식은 아예 없었고, 일년에 몇 번 쇠고기 맛을 볼 수 있는 것은 제사상에 올리는 ‘쇠고깃국’과 ‘산적’이 전부였다. ‘산적’은 그나마 형편 닿지 않으면 건너뛰어야 하지만 가랑잎으로 똥 싸먹을 살림이라도 쇠고깃국만은 꼭 올려야 하므로 어머니로선 제삿날 쇠고깃국 거리를 구하는 일이 평생 짐이었을 터였다. 설령 쇠고기 한 근 구해 와도 그렇지, ‘산적’에 국도 끓여냈으니까 작은 아버지 두 분과 사촌형제까지 합쳐 여남은 명 장정들에게 돌아가는 국은 말이 고깃국이지 소가 밟고 지나가는 형국이 아니었겠는가. 어머니로서는 건더기는 물론이고 국물이나마 한번이라도 푸지게 마셔보지 못했을 게 자명하다.
어머니 제사상에 올리는 우리집 고깃국은 그래서 예나 이제나 별나다. 앞의 시에 쓴 대로 쇠고깃국 그릇에 고기 건더기를 그야말로 ‘꾹꾹 눌러 쟁이는’ 것이다. 고기 건더기가 많이 담겨 숟가락 턱 꽂아놔도 ‘자빠지지 않게’ 해야 어머니 뜻을 받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제사가 끝나면 쇠고깃국은 언제나 그대로 남는다. 아무리 간 맞춰 끓여낸다고 해도 등심이다 티본 스테이크다 갖가지 고기 요리에 입치레를 한 아이들이 도무지 쇠고깃국을 먹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어디 아이들뿐인가. 나 또한 쇠고깃국에, 손이 제대로 가지 않는 터라 남고 처지는 쇠고깃국 치우느라 아내는 번번이 살이 찐다고 엄살을 떤다.
며칠 있으면 어머니 제삿날이 된다. 아내가 시장을 다녀오더니 무거운 장보따리를 내려놓으면서 기어코 혼잣소리처럼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아이고, 한우라고 해서 몇 번이나 다짐을 받고 사긴 사왔지만 한우가 과연 맞긴 맞는지 원. 그나저나 광우병 때문에 난리인데, 다음주 어머님 제삿날에는 소고깃국을 꼭 끓여야 하나 어쩌나.” 쇠고깃국 없는 제사상을 차릴 아내가 아니지만, 그래도 굿거리장단을 맞출 요량으로 내가 짐짓 근엄한 표정을 하면서 퉁바리를 이렇게 놓는다. “허어, 무슨 불경한 소리를. 앞으로 조심, 또 조심하라구. 괜히 울 엄니 상에 광우병 쇠고깃국 끓여 올렸다간 이혼불사이니까 그런 줄 알아!”
이렇게 저렇게 된 세상이다.
이번 제사에서는 ‘한우 쇠고깃국’이라는 걸 어머니께 따로 말씀드려야 하겠다. ‘한우’라면 혹시 아이들도 안 먹던 쇠고깃국을 먹을까. 미국 쇠고기까지 사다 먹어야 하는 우리네 형편을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결론은 ‘나라’가 지키지 못하는 ‘울 엄니 제사상’을 나라도 나서서 지켜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나라’가 나서서 진상 가는 송아지 배때기를 차고 제사상 다리를 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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